일본 외무성의 ‘에이스’인 고무라 주타로(1855~1911) 주러시아 공사가 이임 인사를 위해 크림반도 남부 도시 얄타에 머무르던 세르게이 비테(1849~1915) 러시아 재무상을 찾아온 것은 1900년 12월2일 오후 4시께였다. 그해 봄 시작된 의화단 사건의 여파로 러시아가 만주를 군사 점령하면서 양국 간 긴장이 커지고 있었다. 인사를 마친 뒤 화제는 자연스레 양국 간 최대 현안이던 만주와 한반도 문제로 옮겨갔다.
일본 내 대표적인 대러 ‘강경파’인 고무라는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한다면 한반도는 우리가 갖겠다는 ‘만한교환론’을 꺼내 들며 러시아의 ‘2인자’였던 비테의 의중을 살피려 했다. “현재 일본은 한국에서 최대의 이익을 취하고 있고, 러시아는 근래 만주에 대단히 큰 이익을 설정했다. 일·러 양국이 서로 중대한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각각 한반도와 만주에서) 자유로운 행동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종래 협상에 대신할 합의를 체결하는 문제를 의논했으면 한다.”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원하던 러시아는 이 의견에 따를 뜻이 전혀 없었다. 비테는 “당신은 ‘행동의 자유’를 말하지만 무리하게 단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한국은 완전히 독립된 한국으로 방임하자는 것이 내 의견”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런 뒤 극동 지역 내 러·일의 세력균형에 대한 의견을 길게 늘어놓았다.
“만주에 관해선 사정이 부득이하여 그 지방과 부근에 약 20만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본래 동청철도 부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군대를 들여보낸 것이므로 그곳을 점령할 의사가 없다. (하지만) 만약, 형세가 부득이하여 만주를 러시아 영내로 합병하는 일이 있으면 일본은 (이에 맞서) 한국을 점령하겠다고 할 것이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성립되겠지만, 실제 만약 만주를 영토로 삼는다면 러시아는 한국에 대해 일본보다 밀접한 나라가 된다.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손상시키는 일은 러시아가 동의할 수 없다.”
1900년 가을 이뤄진 러시아의 만주 점령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러·일의 세력 관계는 1 대 0으로 변한 상황이었다. 일본은 자신들도 한반도를 차지해 1 대 1의 균형을 만들려 했지만, 러시아는 “만주를 점령할 생각이 없다”는 논리로 이를 물리쳤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 철군 문제를 논의하는 러·청 협상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브게니 알렉세예프(1843~1917) 관동주 사령관과 쩡치(1851~1919) 셩징(성경) 장군은 길고 복잡한 논의 끝에 11월26일 “건설 중인 (동청)철도의 보전”을 위해 “러시아군이 (계속 만주에) 주둔한다”는 협정안에 합의했다. 비테의 공언과 달리 러시아의 만주 점령이 유지된 것이다. 분노한 청 정부는 이 정보를 베이징 주재 영국인 기자인 조지 모리슨(1862~1920)에게 ‘리크’(누설)했다. 협약안이 1901년 1월3일치 영국 ‘타임스’를 통해 공개되면서, 러시아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난이 커지게 된다. 배신당했다고 판단한 가토 다카아키(1860~1926) 일본 외무대신은 장즈퉁 주일 청국 공사를 불러 “절대 협정을 맺지 말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러·일 불신이 극에 달한 ‘최악의 타이밍’에 러시아가 한반도의 운명을 사실상 결정하게 될 외교적 움직임에 나섰다.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 주일 러시아 공사는 1900년 여름~가을께 조병식 주일 한국 공사가 제안했던 한반도 중립화론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안을 잘 활용해 러·일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외교적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가토는 12월20일 자신을 찾아온 이즈볼스키에게 “한국인이 중립이 어떤 것인지 알고서 그런 논의를 했는지 모르겠다”고 퉁명스레 반응하면서도 “귀국에 안이 있다면 신중히 심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즈볼스키가 본국으로부터 ‘고(go) 사인’을 받은 것은 열흘 뒤인 30일이었다. 해를 넘긴 1901년 1월7일 가토를 방문해 한반도 중립화를 제안한다. 일본이 이를 받아들였다면, 대한제국은 러·일 사이의 ‘중립적 완충지대’로 아슬아슬하게 국권을 보전했을지 모른다. 이것이 갑신정변(1884), 갑오개혁(1894~1996), 만민공동회(1898) 등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한 개혁에 모두 실패한 대한제국이 운 좋게 얻게 된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이즈볼스키가 가토에게 영어로 구술한 제안 원문은 ‘일본외교문서’ 제34권 521쪽에서 찾을 수 있다. “러시아 정부는 열강의 공동보장 아래 한국을 중립화하는 계획을 제의하는 게 바람직(advisable)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이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조건에 관해 비밀스럽고 우호적으로 협의(discuss)할 것을 요청한다.”
일본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저들이 원한 것은 한반도 중립화를 통한 1.5 대 0.5의 ‘기울어진 타협’이 아닌 ‘0 대 0’(러시아의 만주 철군과 조선의 현상 유지) 혹은 ‘1 대 1’(만한교환)의 ‘완벽한 균형’이었다. 가토는 17일 회답을 받으러 찾아온 이스볼스키에게 “한국 중립은 귀국이 만주에 관한 선언(만주 철군)을 실행한 뒤에 의논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크게 실망한 이즈볼스키는 “이 제의는 충분한 우의의 정신으로 한 것이다. 일본 정부가 만주 문제까지 끌어들여 대답했다면 러시아 정부가 악감정을 갖지 않을지 속으로 염려한다”고 말했다.
느닷없는 제안에 당황한 일본은 이 움직임이 대한제국과 교감 아래 이뤄진 것인지 확인하려 했다. 고종은 나흘 뒤인 21일 찾아온 야마자 엔지로 주한 일본 임시대리공사에게 “차제에 한·일 양국은 우의를 더욱 두텁게 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듯 서로 의지하는 의리에 진력해야 한다”는 원론적 반응에 그쳤다. 이 얘기를 들은 야마자는 25일 가토에게 보낸 기밀 전문에서 “폐하는 전적으로 중립 제의를 알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본건에 대해선 러·한 양국 간의 아무런 사전 상담 없이 오로지 러시아 정부의 자체 사정에 의해 제의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적었다.
러시아의 중립화 제안을 거부하긴 했지만, 만주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 스코어는 여전히 1 대 0이었다. 일본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 중차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각의는 3월12일 열렸다. 가토는 이 자리에서 세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1안, “러시아에 대해 공공연히 항의”한 뒤 “목적이 달성되지 않으면 직접 간과(干戈·방패와 창)로 승부를 결정”한다. 2안, “한국에 대해 그동안의 러·일 협상을 무시하는 행동”을 취한다. 이는 곧 대한제국의 멸망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조만간 독립을 상실할 운명에 놓이게 된다. (중략) 한국은 실리상으로 볼 때도 국민감정상으로 볼 때도(韓国ハ實利上ヨリ見デモ、国民感情ノ上ヨリ見デモ) 제국이 포기할 수 없다. 이 나라를 점령하거나 또는 보호국으로 하거나 그 밖의 적의(適宜·적당)한 방법으로 우리 세력 아래 둬야 한다.” 3안, “후일을 기다려 시기적절한 조처를 강구”한다.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자, 15일 이토 히로부미 총리 등이 참석한 원로 회의가 열렸다. 러시아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간과에 호소해 자웅을 결정”해야 하지만, 일본 홀로 “최후의 결심을 하게 되면 매우 위험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3안을 택해야 했다.
러·일의 중립화 교섭이 실패하며 조선은 사실상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됐다. 두 나라가 무력으로 충돌한다면, 조선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었다. 황성신문은 8월28일치 2면에 실린 ‘변만한교환론’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한국을 여(與)하야 일본 세력 범위 내에 치(置)하고, 만주를 아국(러시아) 보호하에 치하자고 주장하는 자가 다(多)하다”면서 “무력강대(武力强大)하고 상하동심(上下同心)하며 민지합일(民志合一)”하는 나라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안타깝게도 이를 주도해야 할 대한제국의 통치 체제는 사실상 무너진 상태였다. 야마자는 1900년 12월25일 의화단 사건 이후 공포에 빠진 고종에게 △군비를 정비해야 한다 △재정을 정리해야 한다 △화폐(백동화) 남발은 불가하다 △기강을 밝히고 법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재판을 공정히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조선의 일류 인사들이었던 김홍집·어윤중 등이 갑오개혁 때 뜯어고치려 한 사회의 병폐가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고종에게 ‘쓴소리’를 해댔던 이 사람들은 잔인하게 살해돼 더 이상 세상에 없었다.
하야시 곤스케 주한 일본 공사는 1901년 5월22일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한국 황제는 배금주의 경향이 있어 전주(錢主·돈 가진 사람)가 있다면 언제 어떠한 경우에도 차입”을 바라고, 외교 역시 “외부대신은 한 부서로 형식만 갖추고 있을 뿐 모든 일은 황제의 지시에 따라 처리되고 있다”고 말했다. 러·일이 정면충돌을 앞둔 상황에서 외교와 내정이 무너져 있었다.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길윤형 |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