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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한겨레 자료사진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한겨레 자료사진

김동훈 | 전국부장

 19세기 말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탈주술화 과정과 근대: 학문, 종교, 정치’라는 책에서 ‘근대’와 ‘전근대’를 나누는 기준을 ‘주술’로 봤다. 즉, 주술에서 탈피하는 것이 ‘근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과 11년 전 ‘전근대’를 경험했다. 박근혜 정부의 비선 실세 최서원(최순실에서 개명)씨는 2013년 2월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때 서울 광화문광장을 오방색 천으로 뒤덮는 이른바 ‘오방낭’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실천했다.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색깔의 조각보로 만든 ‘오방낭’이 세종대왕 동상 앞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취임식을 ‘거대한 굿판’으로 만들려 했다”는 관계자 증언까지 나와 충격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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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서원씨도 윤석열 대통령 부부 앞에선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김건희 여사는 스스로 “나는 영적인 사람이다”, “웬만한 무당보다 내가 더 잘 본다”고 했다. 그의 박사 논문도 사주와 관상 등 점술을 소재로 한 ‘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다.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시절 손바닥에 왕(王) 자를 새긴 것도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주변에 ‘도인’도 많다. 처음엔 건진법사와 관련된 무성한 소문을 낳더니 머지않아 천공이 나타났다. “청와대는 터가 좋지 않다”며 막대한 예산을 낭비한 대통령실 용산 이전에 무속인 천공 개입설이 나왔다. 해괴한 소문은 꼬리를 물었다. 의대 증원 2천명은 천공의 본명 ‘이천공’에서 비롯됐고, “우리도 산유국이 된다”는 천공의 말에 ‘대왕고래 프로젝트’가 나왔다는 설이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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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진과 천공이 잠잠해지자 이번엔 명태균이 등장했다. “도사와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김 여사 말처럼 명씨의 별명은 ‘지리산 도사’다. 압권은 명씨가 말했다는 ‘장님 무사(윤석열)와 앉은뱅이 주술사(김건희)’다. 김 여사가 배후에서 국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의혹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오빠 카톡’에 나오듯이 명씨는 ‘영적인’ 김 여사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영적인’ 말로 “명 선생님” 소리를 들었다. 윤 대통령도 그를 “명 박사”라고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명씨의 ‘꿈 이야기’는 더욱 헛웃음이 나오게 한다. “꿈자리가 사납다. 비행기가 떨어지는 꿈을 꿨다”는 명씨 말에 김 여사가 아시아 정상 배우자가 참여하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프로그램에 불참했다는 주장이 있다. 남편을 솥에 삶아 먹는 ‘윤핵관’으로부터 그를 구해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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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었던’ 명씨가 녹음 파일을 공개하면서 윤 대통령의 공천 개입 의혹과 김 여사의 국정 개입 정황이 드러났다. 명씨는 영어의 몸이 됐다. 대표적인 친윤 검사로 불리는 정유미 검사장의 창원지검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만 명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이 받아들였다. 정 검사장은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 장관을 맹비난하는 글을 검찰 내부 게시판에 올린 인물이다. 명씨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던 윤 대통령 부부로선 일단 한숨 돌릴 법하다.

명씨는 휴대폰 판매업에 종사하다가 ‘전국114 전화번호부’라는 텔레마케팅 회사를 운영했다. 그가 여론조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배경이다. 나이 마흔에 창원대에 진학한 그는 2017년 ‘시사경남’을 창간하고 이듬해 여론조사업체 미래한국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두 법인의 등기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가 2018년 무렵 김영선 전 의원과 친분을 맺은 것도 여론조사가 매개가 됐다.

명씨는 임금 체불에 따른 근로기준법 위반과 사기, 공직선거법 위반 등으로 여러차례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다. 그런 그가 2021년 김 전 의원의 소개로 김 여사를 만났고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적 대화’를 나눴다.

“저, 감옥 가나요?”라는 김건희 여사의 말을 전한 명리학자의 증언처럼 윤 대통령 부부의 주술적 행위는 철저히 자신들의 영달과 보신을 위한 것이다. 그들에게 ‘나라의 안위’는 관심 밖인 듯하다. 윤 대통령 지지율이 10%대까지 떨어지자 여권 내에서조차 “정치는 역시 정치인이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원로 정치인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은 최근 “윤 대통령이 김 여사의 어떤 영적인 세계에 포획돼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전근대’에 갇혀 있는 얼치기 무사와 앉은뱅이 인형술사의 인형극을 언제까지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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