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길옹주
화길옹주
和吉翁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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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궁집 | |
조선 영조의 옹주 | |
신상정보 | |
출생일 | 1754년 5월 19일(음력) |
사망일 | 1772년 12월 18일(음력) | (18세)
부친 | 영조 |
모친 | 숙의 문씨 |
배우자 | 능성위(綾城尉) 구민화(具敏和) |
자녀 | 1남 2녀
구명희, 김이초의 처, 윤영명의 처 |
능묘 | 화길옹주묘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
화길옹주(和吉翁主, 1754년 음력 5월 19일 ~ 1772년 음력 12월 18일)는 조선의 왕족으로 영조의 12녀이며 막내딸이다. 어머니는 숙의 문씨이다. 성은 이, 본관은 전주이며,[1] 화령옹주의 친동생이다.
생애
[편집]가계
[편집]1754년(영조 28년) 5월 19일, 영조와 숙의 문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화령옹주의 친동생이자 진종(효장세자), 장조(사도세자) 등의 이복 동생이며, 정조는 이복 조카이다.
한편 화길옹주의 생모 숙의 문씨는 사도세자를 무고했을 뿐 아니라 여러 불법을 많이 저지르는 바람에 정조가 즉위한 뒤 폐위되고 이내 사사되었다.[2]
옹주 시절과 사망
[편집]11살 때인 1764년(영조 40년) 음력 12월 11일 대장 구선행(具善行)의 손자이자 구현겸(具顯謙)의 아들인 구민화(具敏和)와 정혼하였다. 이때 구민화는 능성위에 봉해졌다.[3] 이듬해인 1765년(영조 41년) 음력 7월 12일 혼례를 올렸다.[4]
그러나 화길옹주는 1772년(영조 48년) 음력 12월 18일 불과 1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5] 죽은 지 5년이 지난 1777년(정조 1년) 그녀의 장례에 무려 10만냥이 지출되었던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6]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다.[1]
기타
[편집]- 화길옹주가 시집을 갈 때 영조는 나라에서 목수와 재목을 보내 집을 지어주었는데, 현재 그 집은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남아있다. 나라에서 지어주었다 하여 "궁집(宮-)"으로 불리며, 1984년 1월 14일 대한민국의 중요민속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었다[7].
가족 관계
[편집]화길옹주는 남편 구민화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구명희이고, 두 딸은 각각 김이초와 윤영명에게 시집갔다.[1] 한편 1894년(고종 31년) 음력 4월 9일 화길옹주의 사손 구뢰서가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8]
왕가(王家 : 전주 이씨)
시가 능성 구씨(綾城 具氏)
- 시할아버지 : 구선행(具善行)
각주
[편집]- ↑ 가 나 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화길옹주〉”. 2013년 9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7월 19일에 확인함.
-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숙의문씨2〉[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조선왕조실록》영조 104권, 40년(1764 갑신 / 청 건륭 29년) 12월 11일(무자) 2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영조 106권, 41년(1765 을유 / 청 건륭 30년) 7월 12일(을유) 1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영조 119권, 48년(1772 임진 / 청 건륭 37년) 12월 18일(무인) 1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정조 3권, 1년(1777 정유 / 청 건륭 42년) 5월 21일(을유) 2번째기사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궁집〉
- ↑ 《조선왕조실록》고종 31권, 31년(1894 갑오 / 청 광서 20년) 4월 9일(을묘) 1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