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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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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공주
淑敬公主
조선 효종의 공주
신상정보
출생일 1648년 1월 29일 (음력)
사망일 1671년 1월 9일(1671-01-09)(22세) (음력)
부친 효종
모친 인선왕후 장씨
배우자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麟)
자녀 1녀 원숙희(元淑喜)
양자 원명구(元命龜)
능묘 원몽린 · 숙경공주묘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상구리 산 11-110

숙경공주(淑敬公主, 1648년 2월 22일(음력 1월 29일) ~ 1671년 2월 17일 (음력 1월 9일))는 조선의 왕족으로, 효종인선왕후의 여섯째 딸이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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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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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8년(인조 26년) 1월 29일, 당시 왕세자였던 봉림대군(효종)과 세자빈 장씨(인선왕후)의 여섯째 딸로 태어났다.

1659년(효종 10년) 3월, 우의정 원두표(元斗杓)의 손자이자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 원만리(元萬里)의 아들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鱗)과 혼인을 약속하였다. 같은해 5월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상을 마치고, 1661년(현종 2년) 가례를 올렸다.

공주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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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4년(현종 5년), 현종은 도방군(到防軍)을 숙경공주의 저택을 짓는데에 보내어 부역을 시켰는데 승지 이원정(李元禎)이 법에 어긋난다며 사역을 중지시킬것을 청하였으나 현종은 이를 묵살하였다.[1] 이후에도 숙경공주의 저택 공사와 관련하여 간원이 중지할 것을 청하였다.

 
숙경공주의 저택 터를 여염집이 즐비한 곳에다 잡아
철거된 인가가 30여 호(戶)에 이른다는 이유로 연달아 아뢰고 힘써 쟁론하였으나,
상(현종)이 따르지 않았다.
— 《현종실록》 18권,
현종 11년(1670년 청 강희(康熙) 9년) 8월 19일 (계묘)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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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년(현종 12년) 1월 9일, 숙경공주는 입궁하여 왕과 대비를 알현하려다가 갑작스럽게 천연두를 앓아 집으로 되돌아갔다. 공주의 생명이 위독해지자 현종은 공주의 시아버지인 원만리를 불러 병구완을 하게 하였으나 곧 죽었다.[2]

숙경공주의 상에 현종이 백관과 함께 숭문당에서 곡을 하였다. 당시 현종의 건강이 좋지 않아 약방에서 만류하였지만 현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3]

숙경공주의 졸기

숙경공주가 죽었다.
공주가 입궐하여 윗전을 뵈러 나아갔다가 갑자기 마마를 앓아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상(현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숭문당(崇文堂)에서 거애(擧哀)하였다.
이때 상이 편찮았으므로 약방(藥房)이 세 번이나 아뢰어
거애하는 일을 멈출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 《현종실록》 19권,
현종 12년(1671년 청 강희(康熙) 10년) 1월 9일 (신유)

숙경공주의 남편 원몽린도 공주가 죽고 3년 뒤 사망했다.

원몽린의 묘비에는 공주가 《소학》과 《내훈》에 통달하였다고 적고 있다.[4] 자식은 외동딸밖에 없어 시조카인 원명구(元命龜)를 양자로 들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4]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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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상구리, 죽서 원몽린 묘역에 있다. 2004년 5월 6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봉분은 단분으로 남편 원몽린과 합장묘이다

석물로는 묘비 1기, 상석,향로석 각 1기, 망주석,문인석 각 1쌍 및 계체석 등이 있다. 봉분은 원형의 호석을 두르고 있고 봉분 주위에는 곡장(曲墻)이 설치되어 있다. 묘역에 이르는 입구에는 신도비가 1기 세워져 있다. 묘역 좌우에는 망주석과 그 앞쪽으로 문인석이 각각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망주석은 폭이 159cm의 규모로 좌우측 모두 올라가는 형태의 쥐모양이 양각되어 있다.

문인석의 형태는 양관조복에 홀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조복 앞면에는 홀을 든 손등으로부터 포(袍)의 주름이 묘사되어 있고 뒷면에는 연화문양이 있는 대(帶)와 여의운문이 양각되어 있는 후수(後綬)를 묘사하였다.

묘소를 둘러싸고 있는 곡장은 좌우 측면만 높게 조성되어 묘역을 보호하고 후면은 3단의 석축으로만 쌓고 뒤쪽에 조성되어 있는 묘역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돌계단을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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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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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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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현종실록》 8권, 현종 5년(1664년 청 강희(康熙) 3년) 6월 24일 (을묘)
    도방군에게 숙경공주 집의 역사를 시키니 승지 이원정이 부당함을 아뢰다
    도방군(到防軍)을 숙경공주의 집을 조성하는 곳으로 보내 일을 시키라고 명하였다.

    숙경공주는 바로 효종의 다섯째 공주인데, 원몽린(元夢鱗)이 곧 부마이다. 승지 이원정(李元禎)이 아뢰기를,

    "도방군을 사가(私家)의 일에 뽑아 보내는 것은 애당초 법례가 아닌데 전 인원을 부역시키기까지 하는 것은 더욱 온당치 않습니다.

    이처럼 덥고 비내리는 날 먼 지방에서 새로 도착한 군인들에게 갑자기 과외의 일을 정해준다면 원망과 고통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신(臣)이 해방에 있다 보니 구구한 생각을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는 새로운 규정이 아니고, 바로 그전부터 행해지던 일이다."

    하였다.

  2. 현종개수실록》 23권, 현종 12년(1671년 청 강희(康熙) 10년) 1월 9일 (신유)
    숙경공주의 병이 위독해지다
    숙경공주의 병이 위독해지자 상(현종)이 수원 부사 원만리(元萬里)를 급히 불러 병을 구완하게 하였다.

    만리는 곧 공주의 시아버지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3. 현종실록》 19권, 현종 12년(1671년 청 강희(康熙) 10년) 1월 9일 (신유)
  4. 《국조인물고》 권6 국척(國戚) - 원몽린의 묘비명(墓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