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공주
정의공주
貞懿公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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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의 공주 | |
이름 | |
별호 | 연창공주(延昌公主) |
신상정보 | |
출생일 | 1415년 9월 27일 |
사망일 | 1477년 3월 5일(양력) | (61세)
부친 | 세종 |
모친 | 소헌왕후 심씨 |
배우자 |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 |
자녀 | 4남 2녀
안여달 · 안온천 · 안상계 · 안빈세, 정광조의 처 · 한치례의 처 |
능묘 | 안맹담 · 정의공주 묘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63-1 |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년 9월 27일(음력 7월 12일)~ 1477년 3월 5일(음력 2월 11일))는 조선의 공주이다. 세종의 차녀이자 적차녀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다. 문종의 동생이자 세조의 작은누나이다.
생애
[편집]1415년(태종 15년),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과 부인 심씨(소헌왕후)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년) 정의공주(貞懿公主)로 책봉되고, 관찰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에게 하가하였다.[1]
정의공주는 세조대에 후한 대우를 받았다. 1456년(세조 2년), 강원도 고성의 온정(溫井)으로 목욕하러 갈 때, 세조가 교자와 담부를 내려주었다.[2]
정의공주가 병을 앓자 세조는 정희왕후와 함께 공주 집에 들러 여러차례 문병하기도 하였고, 정의공주가 황해도 배천으로 목욕하러 가자, 황해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3] 공주에게 전토를 주고 쌀과 곡식을 내리고, 노비를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아들과 사위의 벼슬을 높여 위로하기도 하였다.
1462년(세조 8년) 3월, 안맹담의 여종인 양의장(良衣莊)과 양의장의 어머니인 삼월(三月)이 안맹담을 해치려고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국문을 받고 처형되는 일이 발생하였다.[4] 같은 해 12월, 남편 안맹담과 사별하였다.[5]
1467년(세조 13년), 양성인간으로, 안맹담과 정의공주의 종(奴)인 사방지(舍方知)가 풍기를 문란하게 한 죄로 외방으로 쫓겨났다.[6]
1469년(예종 1년), 정의공주는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상·중·하를 간행하였는데 보물 제966호로 지정되어 있다.[7][8]
1477년(성종 8년) 2월 11일 졸하였다.[9]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기타
[편집]- 세종이 《춘추(春秋)》를 읽다가 정의공주에게 춘추 시대의 옹희(雍姬)와 옹규(雍糾) 부부의 고사를 얘기하며 "아버지에게 알리면 남편이 죽고, 알리지 않으면 아버지가 죽게 될 경우, 너 같으면 어찌하겠느냐?"하고 묻자, 정의공주는 "차라리 제가 먼저 죽을지언정, 그 변은 못보겠습니다." 하고 답하자 세종이 이에 감탄하였다.[10]
- 첫째 아들인 안여달(安如獺)과 셋째 아들인 안상계(安桑鷄)의 이름은 이들의 외조부인 세종이 직접 지어주었는데, 여달과 상계는 세종이 지어준 어릴적 이름을 어른이 되어서도 개명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 불교를 숭상하여 남편 안맹담과 자주 불사를 행하였으며, 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안맹담과 문수사(文殊寺)를 중창하였다.[11]
- 세종은 정의공주에게 한강의 저자도(楮子島)와 낙천정(樂天停)을 하사하였는데, 공주는 이후 막내 아들인 안빈세(安貧世)에게 물려주었다. 안빈세가 그 위에 정자를 짓고 화공에게 명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니, 한동안 이에 대해 시를 읊은 이가 매우 많았으며, 정인지의 서문이 있다.[12][13]
가족 관계
[편집]정의공주와 안맹담 부부는 4남 2녀를 낳았다. 정인지, 한확, 효령대군 등과 이중, 삼중의 혼인관계를 맺었다.
정인지의 아들과 결혼한 장녀 안씨와[14], 둘째 아들인 안온천은 정의공주 생전에 사망하였다. 셋째 아들인 안상계는 세조의 계유정난에 동조하지 않고 저자도에 은거하였다가 예종 대에 복관하였으며, 넷째 아들인 안빈세는 정의공주가 병들자 세조가 특명을 내려 벼슬을 7계급 올려 동부승지에 임명하였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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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공주가 등장하는 작품
[편집]드라마
[편집]소설
[편집]- 《정의공주》, 한소진, 해냄출판사, 2011, ISBN 9788965743057
참고 자료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세종실록》 39권, 세종 10년(1428년 명 선덕(宣德) 3년) 2월 13일 (을축)
정의공주를 죽성군 안맹담에게 시집보내다 - ↑ 《세조실록》 3권, 세조 2년(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2월 2일 (신축)
강원도 고성 온정에 목욕가는 정의공주에게 교자와 담부를 주도록 명하다 - ↑ 《세조실록》 13권, 세조 4년(1458년 명 천순(天順) 2년) 8월 8일 (계해)
황해도 관찰사에게 목욕하러 가는 정의공주를 위해 잔치를 베풀게 하다 - ↑ 《세조실록》 28권, 세조 8년(1462년 명 천순(天順) 6년) 3월 13일 (무신)
연창위 안맹담을 해하려 도모한 계집종 양의장을 국문하고 가두다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의 계집종[婢] 양의장(良衣莊)이 그 주인을 해(害)하려고 도모하여 불측한 말로써 그 어미 삼월(三月)에게 말하고, 삼월은 또한 족질(族姪)인 득부(得夫)에게 말하였는데,득부는 곧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종[奴]이었으므로, 그가 이구(李璆)에게 고하여 전계(轉啓)하니,
밤 2고(二鼓)에 임금이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서 친히 국문하고, 밤이 깊어서야 명하여 궐내에 가두게 하였다.
- ↑ 《세조실록》 29권, 세조 8년(1462년 명 천순(天順) 6년) 12월 25일 (을유)
- ↑ 《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1467년 명 성화(成化) 3년) 4월 5일 (경자)
풍속을 문란하게 한 종 사방지의 죄를 핵실하고 외방의 노비로 소속시키다 - ↑ 심량근.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정의공주”. 2017년 8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5월 25일에 확인함.
- ↑ “훈민정음 '숨은 뒷 이야기' 재해석”. 2018년 3월 20일에 확인함.
- ↑ 《성종실록》 76권, 성종 8년(1477년 명 성화(成化) 13년) 2월 11일 (경진)
- ↑ 《성종실록》 292권, 성종 25년(1494년 명 홍치(弘治) 7년) 7월 25일 (신해)
- ↑ 《문종실록》 7권, 문종 1년(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5월 5일 (임인)
- ↑ 《동국여지지》 제1권 - 경도(京都) 한성부〔漢城府〕
-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2편 한성부(漢城府)
- ↑ 《안맹담 묘비명(安孟聃 墓碑銘)》, 정인지 지음
내 아들이 일찍이 공(안맹담)의 큰사위가 되었는데, 부부가 모두 일찍 죽고 말았다.병자년(1456년)에 며느리를 곡하고, 정축년(1457년)에 아들을 곡하였는데 그 후 5년 만에 또 공을 곡하게 되었으니, 슬픔을 견딜 수 있겠는가?
(중략) 공의 장녀는 절충 장군(折衝將軍) 용양위 대호군(龍驤衛大護軍)ㆍ세자 좌익위(世子左翊衛) 정광조(鄭光祖)에게 시집갔으니, 정광조는 곧 나의 적장자(嫡長子)인데 부부가 모두 일찍 죽었다.
- ↑ 《세조실록》 40권, 세조 12년(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10월 24일 (임술)
안빈세 · 최한경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후원에서 군사 훈련을 구경하다
안빈세(安貧世)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최한경(崔漢卿)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안빈세는 정의공주(貞懿公主)의 아들로서 여러 아들 중에서 글을 조금 알고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공주의 병이 위급하니, 7계급을 뛰어 올려 제수한 것이다.
- ↑ 정인지의 아들
- ↑ 안맹담 → 안온천 → 정경부인 안씨 → 정세호 → 하동부대부인 정씨 → 선조
- ↑ 《성종실록》 261권, 성종 23년(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1월 10일 (신사)
서릉군 한치례의 처 안씨에게 부의를 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