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공주
경신공주
慶愼公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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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공주 초상화 (청주 이씨 소장, 1625년 이모본) | |
조선 태조의 공주 | |
이름 | |
별호 | 경신궁주(慶愼宮主) |
신상정보 | |
출생일 | 미상 (1380년대 초반) |
출생지 | 고려 동북면 영흥 사저 |
사망일 | 1426년 5월 8일(양력) |
부친 | 태조 |
모친 | 신의왕후 한씨 |
배우자 |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이애(李薆) |
자녀 | 1남
이후(李厚) |
능묘 | 이애 · 경신공주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면 산 40-11 |
경신공주(慶愼公主, ? ~ 1426년 5월 8일(음력 3월 22일)) 또는 경신궁주(慶愼宮主)는 조선의 공주로, 태조의 차녀이자 적차녀이다. 어머니는 신의왕후이다.
생애
[편집]출생과 혼인
[편집]태조 이성계의 둘째 딸이자 신의왕후 소생이다.[1] 역사서에서는 태조의 적장녀로 기록되어 있고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도 장녀로 기록되어 있다. 신덕왕후의 딸인 경순공주는 셋째 딸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자춘 신도비(1387년)》 및 《정릉 신도비명(1393년)》을 통해 경신공주가 경순공주보다 늦게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나, 1388년 위화도 회군 당시, 고려 조정에서 요동 정벌에 출정한 장수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으려 하자 오빠인 이방원(태종)이 가족들을 대피시켰는데, 언니 경선공주와 함께 나이가 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2]
1396년(태조 5년) 3월 19일, 이거이의 장남 이백경(李伯卿, 이저와 이애로 개명)과 결혼하였다.[3] 이백경은 당시 33세로 아들 이비(李俾)를 둔 상태였다. 이백경과의 사이에서 아들 이후(李厚)를 두었다.
1404년(태종 4년), 시아버지인 이거이가 모반을 품었다 하여 남편인 상당부원군 이저와 함께 태종에 의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4] 이거이의 두 아들이 왕실의 부마가 되면서[주 1] 세력이 커질 것을 경계하였기 때문이다.[5] 종친과 공신들이 이거이 부자를 처형할 것을 청하자 태종은 이거이와 이저가 왕자의 난 당시 큰 공을 세웠고, 이거이의 또다른 아들인 이백강이 정순공주의 남편이기 때문에 이들을 차마 죽일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6]
이후 태종에 의해 죄를 용서받고 서울에 올라와 살게 되었다.
사망
[편집]1426년(세종 8년) 3월 22일 졸하였다. 경신공주가 죽자 세종은 내관 이용년을 보내어 조문하게 한 뒤, 다음날 쌀과 콩 각 50석과 종이 2백권을 부조하고, 상등(上等)의 예로 장사지내게 하였다.[7]
1872년(고종 9년), 조선 초기 궁주(宮主)들의 봉작을 공주(公主)로 바꾸면서 경신공주로 봉해졌다.[8]
가족 관계
[편집]- 아버지 : 태조(太祖, 1335~1408)
- 어머니 :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1337~1391)
- 시아버지 : 이거이(李居易, 1348~1412)
- 시어머니 : 경주 최씨(慶州 崔氏)[9]
관련 문화재
[편집]- 이애 · 경신공주 묘 - 용인시 향토유적 제31호
경신공주가 등장한 작품
[편집]드라마
[편집]각주
[편집]- ↑ 신명호, 《조선왕비실록》, 역사의아침, 2007, 53p
- ↑ 《태조실록》 1권, 총서
요동 공략에 나선 장수의 가족을 볼모로 삼으려하자, 태종이 포천의 가족을 피신시키다 - ↑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1396년 명 홍무(洪武) 29년) 3월 19일 (병자)
맏딸을 군자감 승 이백경에게 출가시키다 - ↑ 《태종실록》 8권, 태종 4년(1404년 명 영락(永樂) 2년) 10월 24일 (임진)
이거이 · 이저 · 이백강 등을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외방에 안치하다 - ↑ 《태종실록》 8권, 태종 4년(1404년 명 영락(永樂) 2년) 10월 24일 (임진)
이거이 · 이저의 자손을 금고하고, 친인척들도 아울러 치죄하다 - ↑ 《태종실록》 8권, 태종 4년(1404년 명 영락(永樂) 2년) 10월 18일 (병술)
종친 · 공신 등이 여러 차례 이거이 부자의 죄를 청하다 - ↑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1426년 명 선덕(宣德) 1년) 3월 22일 (병진)
경신공주의 졸기
경신공주(慶愼公主)가 졸하였다.내관 이용년(李龍年)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임금은 흰옷에, 오사모·흑각대 차림으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거애(擧哀)하였다.
- ↑ 《승정원일기》 2783책 (탈초본 130책) 고종 9년(1872년 청 동치(同治) 11년) 12월 1일 (신해)
경신궁주 등의 봉작을 고치는 일에 대해 정사를 열어 하비할 것을 청하는 이돈하의 계 - ↑ 최잉(崔陾)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