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용씨
나라 |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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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
시조 | 용득의(龍得義) |
주요 인물 | 용희수, 용환각, 용태영, 용환승, 용홍택, 용경빈, 용덕한, 용준형, 용재현, 용혜인 |
인구(2015년) | 14,483명 |
비고 | 홍천용씨 종친회 |
홍천 용씨(洪川 龍氏)는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용득의(龍得義)는 1208년(고려 희종 4)에 시어사(侍御史)를 지내고, 1241년(고려 고종 28)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고 한다.
역사
[편집]시조 용득의(龍得義)는 1208년(희종 4)에 시어사(侍御史), 1241년(고종 28)에 문하시중(門下侍中), 1271년(원종 12)에 통어사(統御史)를 역임하였다. 1236년(고려 고종 23년)부터 38년까지 16년동안 1차 몽골의 난 때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소실되었던 것을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고종 12년까지 30년간을 최고행정관으로 지내면서 재 각판을 지휘했으며, 총 경판수 8만 1258판에 달하는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각판하는 불사를 지휘하였다. 1241년(고려 고종 28년) 영상(領三台事)에 올랐으며 항몽적인 세력이 정리되면서 벼슬에서 은퇴한 후 홍천군 북방면 장항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금학산에 용수사(龍遂寺)를 세워 중생에게 희망을 갖게 하였으며 불도들의 수련도량으로 학서루(鶴棲樓)를 창건하여 경서(經署)와 시례(詩禮)를 강(講)의하셨으며, 다사(多士)와 준재(俊才)를 많이 육성하였다고 한다.[1]
그 밖에 조선 명종 시기 야사집인 삼한습유기(三韓拾遺紀)에는 용씨와 신천 강씨가 본래 고구려 비류수(현재 중국 만주 혼강) 상류에 위치한 비류국 출신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비류국은 동명성왕의 정복 후에 오부 중 왕가를 배출한 계루부 다음으로 강대한 세력을 가졌던 연노부(비류나부)가 된다.
본관
[편집]홍천(洪川)은 강원도 홍천군의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벌력천현(伐力川縣)이다. 757년(경덕왕 16)에 신라에서 녹효현(綠驍縣)로 고치고 삭주도독부(朔州都督府)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1018년(태조 23) 고려에서 홍천이라 개칭하였고, 조선시대에도 홍천현으로 계속 이어왔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천의 토성(土姓)으로 피(皮)·변(邊)·용(龍) 3성이 기록되어 있다.[2] 1896년 강원도 홍천군이 되었다.
인물
[편집]- 용희수(龍希壽, ? ~ 1397년) : 조선 개국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고, 검교전서(檢校典書)를 지냈다.[3]
- 용운(龍雲) : 임진왜란 후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 용태영(龍太暎, 1929년 ~ 2010년) : 변호사
- 용수택(龍洙澤, 1942년 ~ ) : 한국보호연예인협회 회장,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의장
- 용혜원(龍惠園, 1952년 ~ ) : 시인, 유머자신감연구소 원장(본명은 용영덕)
- 용태순(龍泰淳, 1959년 ~ ) : 연세대학교 의과대 교수
- 용환승(龍煥昇, 1960년 ~ ) : 이화여자대학교 컴퓨터전자공학부 교수
- 용홍택(龍洪澤, 1962년 ~ ) : 제4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1차관
- 용성진(龍聖鎭, 1975년 ~ ) :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공판부 부장검사
- 용태호(龍泰昊, 1977년 ~ ) : 대전지방검찰청 검사
- 용혜인(龍慧仁, 1990년 ~ ) : 제21대 국회의원
과거 급제자
[편집]홍천 용씨는 조선시대 무과 급제자 10명, 진사시 2명을 배출하였다.[4]
- 무과
용광연(龍光淵) 용기연(龍起淵) 용득주(龍得珠) 용득택(龍得澤) 용세웅(龍世雄) 용세유(龍世裕) 용오채(龍五采) 용운(龍雲) 용유익(龍有翼)
- 진사시
용일희(龍一羲) 용중핵(龍重翮)
- 취재
용홍필(龍弘弼)
인구
[편집]- 1985년 2,749가구 11,794명
- 2000년 3,930가구 12,733명
- 2015년 14,483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