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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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고려 공양왕의 생부 정원군에 관한 것입니다. 조선 인조의 생부 정원군에 대해서는 조선 원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정원부원군
定原府院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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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신 | |
대관식 | 정원부원군 |
전임 | 순화후(淳化侯) |
후임 | 공양왕(恭讓王) |
부왕 | 순화후(淳化侯) |
이름 | |
휘 | 왕균(王鈞) |
이칭 | 정원군 |
별호 | 정원군(定原君) 정원백(定原伯) 인효대공(仁孝大公) 삼한국(韓國國) 인효대공(仁孝大公) |
시호 | 인효(仁孝) |
신상정보 | |
출생일 | 생년 미상(生年 未詳) |
사망일 | 몰년 미상(沒年 未詳) |
왕조 | 고려(高麗) |
가문 | 개성(開城) |
부친 | 순화후(淳化侯) |
모친 | 부인 신씨(婦人 申氏) |
배우자 | 국대비 왕씨(國大妃 王氏) |
자녀 | 정양군(定陽君) 고려 공양왕(恭讓王) |
종교 | 불교(佛敎) |
정원부원군 왕균(定原府院君 王鈞, 생몰년 미상)은 고려 후기의 문신, 왕족, 외교관으로 고려 신종의 아들 양양공의 5대손[1]이며 순화후 왕유의 아들이다. 정원백(定原伯)이 되었다가 뒤에 부원군으로 개봉되었다. 정양군 왕우, 공양왕 왕요 형제의 아버지이다. 이름은 균(鈞), 시호는 인효(仁孝)이고, 본관은 개성이다.
생애
[편집]생전에 정원군(定原君)에 봉해졌으며 1355년 대호군(大護軍) 김진(金瑨)과 더불어 원에 가서 방물(方物)을 바치고 귀국했다. 그 뒤 1356년 다시 원나라에 가서 어주(御酒)를 받아 돌아오자, 왕은 특별히 그에게 정원백(定原伯)에 봉하였다.[2] 1358년 원나라에 하례사로 다녀온 뒤에 작위를 고쳐 부원군(府院君)을 봉하였다.[2]
충렬왕의 장자 강양공 왕자의 손녀딸 국대비 왕씨와 결혼하였다. 사망년월일과 장지는 미상이다. 사후 둘째 아들 요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삼한국 인효대공(三韓國仁孝大公)으로 추봉되었다.
가계
[편집]부인 국대비 왕씨는 부계로 촌수로 13촌간이 된다. 국대비 왕씨는 정원부원군의 6대조 신종의 형 명종의 7대손이 된다.
- 7대조 : 고려 제17대 인종(仁宗, 1109~1146, 재위: 1122~1146)
- 6대조 : 고려 제20대 신종(神宗, 1144~1204, 재위: 1197~1204)
- 현조 : 양양공 왕서(襄陽公 王恕) - 양양공#가족 관계
- 고조 : 시안공 왕인(始安公 王絪)
- 증조 : 서원후 왕영(西原侯 王瑛)
- 조부 : 익양후 왕분(益陽侯 王玢, ? ~1291)
- 숙부 : 보성군 왕희(寶城君 王熙)
- 숙부 : 익흥군 왕연(益興君 王璉)
- 아버지 : 마한국인혜공 순화후 왕유(馬韓國仁惠公 淳化侯 王瑈, ? ~1360년 5월)
- 어머니 : 마한국명예비 신씨(馬韓國明睿妃 申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