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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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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나리
제2대 쓰시마 후추번 번주
1615년 ~ 1657년
신상정보
출생 게이초 9년 음력 1월 15일(1604년 2월 14일)
사망 메이레키 3년 음력 10월 26일(1657년 12월 1일)
개명 사다미쓰(貞光, 초명) → 요시나리
별명 히코시치로(彦七郎), 통칭 히코산(彦三)
계명 光雲院殿性岳宗見大居士
막부 에도 막부
쓰시마 후추번주
관위 종4위하, 시종(侍従), 쓰시마노카미(対馬守)
씨족 소씨
부모 아버지: 소 요시토시
어머니: 가와무라씨(河村氏, 또는 아비루씨阿比留氏라고도 하며, 법호는 이토쿠인威徳院)[1]
형제자매 요시나리, 스기무라 도모쓰구杉村智次의 아내,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의 아내, 소 나리치카宗成親의 아내, 후루카와 나리쓰구古川成倫의 아내, 우치노 스케나리内野助成의 아내
배우자 정실: 히노 스케카쓰(日野資勝)의 딸·요교인(養玉院)
측실: 히라마쓰 노부나오(横松信直)의 딸
자녀 요시자네(義真), 호소카와 사네우지(細川真春, 차남), 후쿠(福, 마쓰다이라 다카쓰나松平隆綱의 아내, 나가(長, 오타 스케쓰구太田資次의 계실), 딸(마쓰다이라 마사노부松平正信의 정실), 가쓰(勝, 산조 긴토미三条公富의 아내)
묘소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이즈하라정(厳原町) 고쿠분(国分)의 반쇼인(万松院)

소 요시나리(일본어: 宗義成, 1604년 음력 1월 15일 ~ 1657년 음력 10월 26일)는 쓰시마 후추번의 제2대 번주이다.

생애

[편집]

게이초 9년(1604년) 1월 15일 초대 번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게이초 20년(1615)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상경하여 오고쇼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알현하고 가독상속을 허락받아 제2대 번주가 되었다. 같은 해 4월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 도쿠가와 군으로 참전하고 단바방면의 수비를 담당했다.

겐나 3년(1617년) 3월, 종4위하(従四位下)에 서위(叙位)되었다. 그 후, 검지(検地, 토지 조사)를 하고 보다이지(菩提寺)[2]인 반쇼인(万松院)을 창건했다. 조선 통신사의 대우 간소화에 의한 재정절감을 하고, 은광개발 등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번의 정책의 기초 굳히기에 전념했다. 그런데 간에이(寛永) 12년(1635년), 부친이 조선기유약조(己酉約条)를 맺었을 때 국서를 위조한 사실 등이 막부에 폭로되어 소(宗) 씨는 개역(改易)[3]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家光)는 조선과의 통로역으로서 소 씨를 이용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결단에 의해 가로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등이 처벌되는데 그쳐 소 씨는 개역을 면한 것이다(柳川一件-야나가와 잇켄).

조선 인조 23년(1645년) 6월 조선에서 표류해 온 사람들을 조선의 동래부로 송환하였다. 동래부사 이원진은 이때 회답하는 서계에서 감사하는 뜻을 전하면서 향후 오가는 국서의 자항(字行)의 높낮이도 어긋남이 없도록 해달라고 청하였다고 전하고 있다.[4]

메이레키(明暦) 3년(1657년) 10월 26일에 에도에서 향년 54세로 사망했다. 가독은 장남 요시자네(義真)가 이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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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의 《조선왕조실록》 인조 23년(1645년) 6월 2일(계축)자 기사에는 쓰시마 도주의 어머니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두고 예조가 조위(吊慰)와 부의(賻儀)하는 문제를 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6월 2일 계축) 그러나 일찍이 관백(關白)이나 도주(島主)의 초상에 부의를 표하는 전례가 없었다는 경상감사 유철(兪㯙)의 치계에 따라 쓰시마 도주의 어머니 상에 부의하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6월 16일 정묘 1번째 기사)
  2. 조상 대대의 위패를 안치하여 명복을 비는 절
  3. 장원제(莊園制)에서, 관직에서 몰아내고 다른 사람으로 바꿈
  4.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6월 6일 정사 3번째기사

같이 보기

[편집]
전임
소 요시토시
제2대 쓰시마 후추번 번주 (소가)
1615년 ~ 1657년
후임
소 요시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