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수 (조선)
보이기
박인수
朴仁壽 | |
---|---|
조선의 문인 | |
이름 | |
별명 | 자: 덕로(德老)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21년 |
사망일 | 1592년 |
국적 | 조선 |
본관 | 개성 |
부모 | * 아버지: 박련(朴連) * 어머니: 한씨(韓氏) |
직업 | 문인 |
박인수(朴仁壽: 1521년~1592년[1])는 조선의 문인이다. 본관은 개성, 자(字)는 덕로(德老)이다.[2] 아버지는 박련(朴連)이고,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3] 박예수(朴禮壽)의 형이다.[4] 서울에서 살았다.[5]
이력
[편집]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그가 신벌(申橃)의 노비라고 되어 있다.[6] 그리고 아우와 함께 시전에서 비단을 파는 상인이라고 설명한다.[7]
수암 박지화에게서 감화를 받아 장사를 그만두고 척암(惕庵) 김근공에게 나아가 《소학》, 《대학》 등과 같은 유교 경전을 배웠다.[8]
당대의 명류들이 그와 교유했다.[9]
평소에 방 하나를 정돈해서 왼편에는 거문고, 오른편에 책을 놓아두고 살았다.[10]
신흠의 기록에 그의 행실이 자세하게 쓰여있다.[11]
1592년(선조 25년) 봄에 신흠을 만난 적이 있다.[12] 같은 해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몇 달 안 있어 병으로 죽었으며, 선영(조상의 무덤) 곁에 묻혔다.[13]
- 아버지: 박련(朴連)
- 어머니: 한씨(韓氏)
- 본인: 박인수
- 아내: 장씨(張氏)
- 아들: 박기원(朴奇元) - 가선대부까지 이름
- 첫째 손자: 박경남(朴敬男)
- 둘째 손자: 박효남(朴孝男)
- 셋째 손자: 박제남(朴悌男)
- 넷째 손자: 박성남(朴成男)
- 막내 손자: 박의남(朴義男)
- 맏딸: 상궁(尙宮)[15] 박씨
- 둘째·막내딸: 일찍 사망
- 아들: 박기원(朴奇元) - 가선대부까지 이름
- 아우: 박예수(朴禮壽)
전기 자료
[편집]- 신흠, 《상촌집》 권25, 박생 묘표
- 성문준, 《창랑집》 권4, 박생 묘표
참고 자료
[편집]- 유몽인 지음, 신익철 외 3인 옮김, 《어우야담》, 돌베개, 2006
- 신흠의 《상촌집》
- 성혼의 《우계집》
- 성문준의 《창랑집》
각주
[편집]- ↑ 신흠, 〈박생 묘표〉(《상촌집》 권25), "生于正德辛巳。卒于萬曆壬辰。"
- ↑ 신흠, 〈박생 묘표〉, "生名仁壽。字德老。松京人。"; 성문준, 〈박생 묘표〉(《창랑집》 권4), "生名仁壽。系出開城。"
- ↑ 성문준, 〈박생 묘표〉, "父曰連。母韓氏。"(신흠의 기록에는 韓이 乾으로 잘못 되어 있음)
- ↑ 성혼, 《우계집》 권6, 〈잡저〉, “丁亥三月旬後。朴仁壽之弟禮壽過訪.”
- ↑ 성문준, 〈박생 묘표〉, "居王京。"
- ↑ 유몽인 지음, 신익철 외 3인 옮김, 《어우야담》, 돌베개, 2006, 123면
- ↑ 유몽인 지음, 신익철 외 3인 옮김, 같은 책, 돌베개, 2006, 804면
- ↑ 성문준, 〈박생 묘표〉, "一日。見朴守菴枝華。始覺其學之誤。卽棄之歸。遍參名賢。求所未聞。服其訓戒。讀習小大學論孟中庸等書。"; 신흠, 〈박생 묘표〉, "洎見朴守庵枝華。聞爲已之學。旋詣金惕庵謹恭席下。受小學大學諸傳。"
- ↑ 신흠, 〈박생 묘표〉, "一世名流。擧折官位願與之交。"; 성문준, 〈박생 묘표〉, "一時名流。多忘其賤而與之遊。"
- ↑ 신흠, 〈박생 묘표〉, "居恒掃一室。左琴右書。於外慕泊如也。"; 성문준, 〈박생 묘표〉, "凈掃一室。左右琴書。潜心探賾。不願乎外。"
- ↑ 신흠, 〈박생 묘표〉, "家不私貨。咸歸于親。生養死祭。俱致其極。推己遺餘。施及同產。敎子義方。克有所立。其修於戶庭者又如此。"
- ↑ 신흠, 〈박생 묘표〉, "蓋歲壬辰春。朴生踵門而來見余。余固目擊而知其所存。"
- ↑ 성문준, 〈박생 묘표〉, "壬辰之亂。生奔入道峯山中。時已年逾七十。喪亂顚沛之際。誦讀不輟。無異平居。居數月。病殁。從葬先隴之側。"
- ↑ 이것은 성문준의 〈박생 묘표〉(《창랑집》 권4)와 성혼의 《우계집》 권6, 잡저의 기록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 ↑ 여관(女官)의 정5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