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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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원명(原名)은 최창수(崔昌洙) 개명(改名)은 강문수(姜文秀) |
출생 | 1918년 10월 18일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진주 |
사망 | 1962년 6월 26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45세)
성별 | 남성 |
직업 | 가수 |
장르 | 트로트 |
활동 시기 | 1936년 ~ 1962년 |
학력 | 진주제2소학교 졸업 진주고등보통학교 중퇴 |
배우자 | 김은하(이혼) |
가족 | 자형 손홍팔(법조인) |
종교 | 불교 |
웹사이트 | 가요황제 남인수 전승보전회 |
대표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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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수의 소야곡〉 | 1938년 |
〈낙화유수〉 | 1942년 |
〈가거라 삼팔선〉 | 1947년 |
〈달도 하나 해도 하나〉 | 1949년 |
〈이별의 부산정거장〉 | 1954년 |
〈추억의 소야곡〉 | 1955년 |
〈산유화〉 | 1956년 |
〈무너진 사랑탑〉 | 1959년 |
남인수(南仁樹, 1918년 10월 18일~1962년 6월 26일[1])는 일제강점기 시기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학력
[편집]생애
[편집]- 1918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했다.
- 처음 이름은 최창수(崔昌洙), 강문수(姜文秀)이다.
- 학력은 1932년 진주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했음이 일제시대 학적부[2]를 통해 확인된다.[1] 남인수는 가수로 데뷔하면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다.
- 남인수의 친모 장하방은 처음 최씨 집안(진주시 미천면 미곡리)으로 출가하였으나 남편의 사망으로 진주 하촌동 드무실에 사는 강영태의 소실로 들어가 낳은 아이가 강문수(예명 남인수)이다.[3]
- 다소 불우한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다.
- 현재 남인수의 가족은 미국에 살고있는데 그간 진주의 강씨집안과는 교류가 없었다.
- 이는 남인수의 어린시절이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강씨집안에서는 추정한다.
- 현재 진주 강씨집안과 남인수 전승 보전회에서 진주시 하촌동에 있는 강씨집안 묘지에 남인수의 묘를 이장하여 단장하고 관리하고 있다.[2] [3]
- 남인수 묘소 근처에 진주시에서 설치한 작은 정자가 있는데 정자의 이름이 '문수정'이다.
- 남인수의 본명인 '강문수'의 이름을 딴 것이다.
- 1936년 당시 9세의 소년 시인이었던 김상화 작가의 시에 곡을 붙인〈눈물의 해협〉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고, 1938년 데뷔곡을 이부풍이 개사한 〈애수의 소야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약 20여 년간 타고난 미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물방아 사랑〉, 〈꼬집힌 풋사랑〉, 〈감격시대〉, 〈항구의 청춘시(靑春詩)〉,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청노새 탄식〉, 〈낙화유수〉,〈남아일생〉,〈일가 친척〉;〈가거라 삼팔선〉,〈달도 하나 해도 하나〉, 〈청춘 무성〉, 〈고향의 그림자〉, 〈고향은 내 사랑〉, 〈이별의 부산정거장〉, 〈청춘 고백〉, 〈추억의 소야곡〉, 〈산유화〉, 〈울리는 경부선〉,〈무너진 사랑탑〉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 약 1천곡 가까운 노래를 불렀고, "가요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개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인생의 애달픔, 유랑의 슬픔 등을 그린 노래였다.
-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은 시에론레코드에서 취입한 데뷔곡으로 큰 반응을 얻지 못했던〈눈물의 해협〉의 가사를 바꿔 다시 부른 노래였다.
- 남인수는 시에라레코드의 박영호, 박시춘을 통해 가수로 데뷔했다가 오케레코드에서 스타가 되었다.
- 이 당시 남인수의 등장은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미성의 가수 탄생'으로 크게 선전되었다.
- 남인수는 음역이 넓고 감정 표현도 풍부하여 가수로서의 천부적인 재질을 갖고 있었다.
- 목소리가 옹골찬 미성인데다 음높이와 발음이 정확하여 고음 처리에 강점을 보였다.
- 남인수의 등장으로 채규엽, 고복수, 강홍식 등 이전 세대 인기 가수의 시대가 저물고 가요계의 새로운 판도를 열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 일제강점기 말기에 백년설, 박향림과 함께 부른 〈혈서지원〉을 비롯하여 〈그대와 나〉, 〈아들의 혈서〉 등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는 강제 동원 가요를 군국 일제에 의해 취입하였다.[4]
-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에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다.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남인수를 백년설과 함께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심의 대상자 명단에 올렸지만 대중 가수가 갖고 있던 당시의 사회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기각했다.[5]
- 동료 가수 이난영과의 로맨스가 유명하다.[6]
- 이난영은 원래 작곡가 김해송의 부인이었으나 한국 전쟁 때 남편이 실종되면서 남인수의 도움으로 김해송이 운영하던 악단을 운영했다.
- 1962년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도 이난영이 간호해 주었다.
- 1962년 7월에 폐결핵으로 결국 세상을 떠났고, 사망 전 한국연예인협회 부이사장, 대한가수협회 회장 등을 지냈고, 장례식은 연예협회장으로 치러졌다.
- 진주의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7] 되어 있고[8], 동상과 노래비도 세워져 있다.[9]
- 주요 노래로는 "낙화유수", "가거라 삼팔선", "추억의 소야곡",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과 함께 1949년 9월 1일에 대한민국 최초로 금지곡이 된 여순사건을 다룬 "여수야화"가 있다.
참고자료
[편집]- 강옥희,이영미,이순진,이승희 (2006년 12월 15일).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서울: 소도. 97~99쪽쪽. ISBN 978-89-90626-26-4.
각주
[편집]- ↑ “톱流行歌手 南仁樹氏 別世” (PDF). 경향신문. 1962년 6월 27일. 3면면. 2019년 3월 2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3월 29일에 확인함.
- ↑ 진주 강씨집안에서 봉래초등학교 학적부를 통해 확인하였다
- ↑ 진주 강씨문중에서 남인수의 출생관련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진주시 미천면 미곡리 최씨집안 대종회를 방문하여 확인한 사실이다. 최씨집안에서는 남인수의 출생 관련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 윤성효 (2007년 10월 7일). “"남인수 '친일행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 9일 진주성 '남인수 가요제' 앞두고 민족문제연구소 자료 공개”. 오마이뉴스. 2008년 4월 28일에 확인함.
-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Ⅱ》. 서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22쪽.
- ↑ 최규성 (2003년 6월 4일). “[추억의 LP여행] 이난영(下)”. 주간한국. 2008년 2월 22일에 확인함.
|제목=
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 최규성 (2005년 4월 18일). “남인수 '애수의 소야곡' 생가 문화재로 지정”. 조선일보. 2005년 4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2월 22일에 확인함.
- ↑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근거 부족 등을 이유로 8년이 지나서 지정이 해제되었다.
- ↑ 강문영 (2005년 9월 5일). “황국신민 맹세한 인물이 한국음악의 거목 - [친일음악편] 홍난파, 현제명, 김성태, 남인수 등 24명”. 컬처뉴스.
|제목=
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25) (도움말) - ↑ 윤성효 (2006년 9월 8일). “친일 논란 '남인수 가요제' 법정 간다 - 진주시민운동, '가요제 중단' 가처분소송 등 내기로”. 오마이뉴스. 2008년 2월 22일에 확인함.
- ↑ 양정석 (2005년 7월 21일). “KBS '가요무대' 남인수 헌정무대 씁쓸”. 오마이뉴스. 2007년 11월 1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편집]- 가요황제 남인수 전승보전회 홈페이지 Archived 2007년 9월 28일 - 웨이백 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