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지(Press Guidance·언론 대응을 위한 정부 입장)를 낸 것으로 보고를 받았습니다. 멀리 가 있어서 상황 관리가 제때제때 안 됐습니다”
윤후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8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 사도광산 관련 긴급현안질의에서 “이탈리아 주요 7개국(G7) 외교장관회의에서 다른 회담 결과는 보도자료를 다 냈는데, 일본 외무상과 회담한 것은 보도자료를 내지 않으니, 국민이 알 수가 없었다”고 지적하자,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본부와 직접 연락하기 어려운 탓에 보도자료 대신 피지로 대신했다는 해명이었다.
조 장관이 말한 피지란 무엇일까. 외교 당국은 피지가 ‘언론이 물을 것으로 예상되는, 혹은 물은 사안에 대해 준비해 놓은 답변’, 즉 사안들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라고 설명한다. 외교 당국의 설명대로 취재진이 안내받는 피지는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된다. 조 장관이 언급한 피지는 “주요 7개국(G7) 외교장관회의 계기 개최된 한일 외교장관회담에서 사도광산 추도식 관련 유감을 표명하였는지?”라는 질문과, “조태열 외교장관과 일본 이와야 다케시 외무대신은 주요 7개국 외교장관회의 계기에 11월26일 약식회담(pull-aside)을 가졌음. 양 장관은 11월24일 사도광산 추도식으로 불거진 문제가 양국 관계 발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고, 이제까지 가꾸어 온 양국 협력의 긍정적 모멘텀을 이어 나가자는 데에 의견을 같이 하였음”이라는 답변으로 구성됐다.
그렇다면 윤 의원이 의문을 제기한 것처럼 외교당국은 왜 보도자료 대신 피지라는 방식으로 정부의 입장을 알리는 걸까. 첫번째 이유는 신속성이다. 보도자료를 만들려면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보고체계도 거쳐야 해 시간이 걸린다. 이것을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 피지를 통해 빠르게 정부의 입장을 언론에 알린다는 것이다. 또한, 보도자료로 공개적으로 알리기 민감한 사항인 경우 피지를 이용하기도 한다. 공식적인 보도자료가 아니어서 사안을 알리는 ‘급’이 조금은 낮아진다는 것이다.
주요 7개국 장관회의를 계기로 열린 한일 약식회담을 보도자료 대신 피지로 배포한 것에 대해 조 장관은 “제때 관리가 안 됐다”, 즉 전자가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각 한-인도네시아 외교장관회담 등의 보도자료는 배포된 것을 볼 때 ‘보도자료로 알리기 민감한 사항’이라고 판단했을 여지가 크다. 윤 의원의 비판도 이런 지점에서 나왔다.
피지는 공식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사용해 사실상 공식 용어처럼 굳어져 버렸다. 이처럼 외교 당국의 주요 관행이 된 피지는 2000년대 초반 최영진 전 주미대사가 매일 언론대응 지침을 정하는 미국의 관행을 들여오자고 제안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당시 한국에서는 각 분야의 담당자가 제각기 사안을 설명했고 정부의 입장이 중구난방으로 언론에 나갔다고 한다. 이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한 최 전 대사가 한국도 일관된 입장을 미리 준비해놓자고 제안했고, 이것이 외교·안보 부처 전반의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는 설명이다.
관행을 공유하는 외교가의 성격상 다른 나라들 역시 ‘피지’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언론대응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앞서 설명한 대로 전 부처가 매일 피지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설명하기 위한 정부 입장을 만든다고 한다. 일본은 피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대외응답요령’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정부 입장을 만들어 놓는다.
신형철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