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공 (여말선초)
안경공(安景恭, 1347년 ~ 1421년 1월 10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자(字)는 손보(遜甫)이다. 안종원(安宗源)의 3남이다.
생애
[편집]1365년(공민왕 14)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1372년(공민왕 21)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다.
이듬해 낭장(郎將)·사헌규정(司憲糾正)으로 뛰어올랐다가, 1376년(우왕 2)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로 재직 중 동진사(同進士) 10위로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전리좌랑(典理佐郞), 전법좌랑(典法佐郞), 사헌지평(司憲持平) 등을 거쳤다가[1], 1382년(우왕 8)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재직 중 합주(陜州)[2]의 사노(私奴)들이 검대장군(劍大將軍)·초군장군(抄軍將軍)·산군장군(散軍將軍)을 칭하고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키자, 군사를 보내 이를 진압했다.[3]
1390년(공양왕 2) 판서(判書)로 재직 중 성석연(成石珚)과 함께 정몽주(鄭夢周)를 탄핵하다 좌천되기도 했으나[4], 이듬해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다.
1392년(공양왕 4) 4월 좌부대언(左副代言), 6월 좌대언(左代言)을 거쳐[5], 7월 조선 개국에 동참했다.
같은 해 중추원도승지(中樞院都承旨)에 임명되고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이듬해 2월 대사헌(大司憲)·도평의사사사(都評議使司使)·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로 승진했다.[1]
9월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제도가 회복되자 전라도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로 나갔으며[6], 이후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
1406년(태종 6)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1410년(태종 10) 유후(留後), 1416년(태종 16)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거쳤으며, 1421년(세종 3) 향년 75세로 졸했다.
시호는 양도(良度)이다.[1]
가족 관계
[편집]- 증조 - 안석(安碩)[7] : 문과에 급제했으나 벼슬하지 않음, 증(贈) 밀직제학(密直提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