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염
류염(柳琰, 생몰년 미상)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생애
[편집]1378년 음보(蔭補)로 천거되어 판관(判官)을 지내다가, 1383년(우왕 9) 병과(丙科) 2등으로 과거에 급제하였다.[1]
1388년(창왕 즉위년) 좌부대언(左副代言)으로 있었는데, 같은 해 즉위한 창왕(昌王)이 서연(書筵)을 개설하자 좌대언(左代言) 권근(權近),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서연시독(書筵侍讀)에 임명되었다.[2]
그러나 이듬해 김저(金佇)와 변안열(邊安烈)의 옥사로 우왕(禑王)과 창왕 부자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을 때, 장인인 문하시중(門下侍中) 이림(李琳) 등과 함께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 공양왕(恭讓王)의 어머니인 국대비(國大妃) 왕씨(王氏)의 생일을 맞아 사면되었다.[3]
이후 조선조에 들어와, 1402년(태종 2)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제도가 복구되자 전라도(全羅道)의 도관찰출척사에 임명되었다.
1417년(태종 17)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판진주목사(判晉州牧事)로 재임 중 사헌부(司憲府)로부터 군인을 함부로 뽑고 기생들과 함께 사냥을 갔다는 등의 탄핵을 받았으나, 태종(太宗)이 그와 동년(同年)이라는 이유로 그를 비호하여 죄를 면하게 되었다.[4]
이후 관직이 이조판서(吏曹判書)·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지경연성균관사(知經筵成均館事)·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이르렀고, 사후에는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