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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E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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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E 도서관(일본어: CIE図書館 시아이토쇼칸[*], 영어: SCAP CIE Information Center, SCAP CI&E Information Center Library[1][2])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SCAP)의 민간정보교육국(CIE)이 일본 각지에 설치한 도서관이다.

전후 일본에서 연합군 최고사령부(GHQ/SCAP)의 민간정보교육국(CIE)이 삿포로, 하코다테, 센다이, 아키타, 도쿄(히비야 및 신주쿠), 요코하마, 니가타, 가나자와, 나가노, 시즈오카, 나고야, 교토, 오사카, 고베, 오카야마, 히로시마, 다카마쓰, 마쓰야마, 고쿠라(현 기타큐슈), 후쿠오카, 나가사키, 구마모토의 23곳에 설치한 미국식 도서관으로,[2] 일본 국민의 민주화와 미국에 대한 이해, 일본 공공도서관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연합군에 의한 점령이 끝나면서 이 중 13개관이 미국문화센터(ACC)로 이관되었으나, 나머지는 폐지되어 장서가 공공도서관에 통합, 기증되었다(도쿠시마와 구마모토에서는 시립도서관의 전신이 되었다).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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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영어 명칭은 1948년 8월 이후 "CIE Information Center", 즉 "인포메이션 센터"로 정해졌으나,[3] 시민과 언론 등에서는 일반적으로 "CIE 도서관"이라 불렸다.[2] 나가사키 CIE 도서관의 경우 홍보용 리플릿에서 도서관 명칭을 "나가사키 CIE 도서관"(長崎CIE圖書館), "SCAP CIE INFORMATION CENTER NAGASAKI"로 표기하고 있다.[4] 전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에 '인포메이션'의 번역어로 첩보를 연상시키는 '정보'라는 단어의 사용을 피하려 했다는 일화도 있다.[5] 별칭으로는 "CIE 라이브러리", "SCAP(스캡) 도서관", "미국 도서관" 등이 있다.

한편, 연합군 최고사령부(GHQ/SCAP)의 민간정보교육국(CIE) 외에도 미국 태평양 육군 최고사령부(GHQ/USAFPAC)가 관할하는 각지의 지방군정부에도 민간정보과(CIE)가 있었으며,[6] 이들 역시 지방의 공공도서관, 공민관, 학교 등에 "CIE 독서실"(CIE Reading Room)을 설치했기에 이들과 혼동되는 경우가 있다.[6] 다만 이러한 지방군정부의 CIE 독서실 중에는 후에 SCAP CIE로 이관되어 "CIE 도서관"의 분실이 된 곳도 있다.[7] 그 외에는 폐지되거나 공공도서관, 공민관 등에 통합되었다.[6]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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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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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이 종결되고, 일본은 연합군의 점령하에 놓였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어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기까지의 7년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SCAP)에 의해 민주화와 다양한 개혁이 추진되었다.

이 GHQ/SCAP의 부서 중 하나로, 민주주의의 보급과 국가주의의 배제, 교육개혁 등을 담당하는 민간정보교육국(CIE)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도서관 정책을 담당하는 담당관도 배치되어 있었다. 초대는 필립 O. 키니, 2대는 폴 J. 바넷, 3대는 제인 페어웨더였으며, 바넷은 도쿄(히비야) CIE 도서관장도 겸임했다. CIE의 도서관 정책에는 국립도서관, 공공도서관, 학교도서관, 대학도서관 등 각종 도서관의 개혁 외에도 직원 양성과 도서관 협력, 이 CIE 도서관의 설치, 운영이 포함되어 있었다.

타국(특히 점령지역)에 도서관을 설치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으며, 일본도 점령하의 조선과 대만에서 도서관을 설치했었다. 미국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국전시정보국(OWI)이 각국에 도서관을 전개했으며,[8] 미국 국무부가 나치로부터 해방된 지역에 소규모 도서관 "인포메이션 라이브러리"를 설치했다.[9] 다만 독일, 오스트리아, 일본, 조선에 대한 도서관 설치는 국무부가 아닌 전쟁부의 관할이었기 때문에 "인포메이션 센터"라는 명칭이었다.[9]

1946년에 CIE가 미국교육사절단의 안내서로 간행한 《일본의 교육》(Education in Japan)에서는 CIE 도서관의 목적에 대해 "일본의 문필가, 학자, 관료, 정치인, 제단체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국제관계와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참고자료와 서적을 제공하고, 미국의 관습, 법률, 사회, 정치기구에 근거한 활동과 정책의 실태를 알리고자 하는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10]

창설과 각지로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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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CIE 도서관은 1945년 11월 15일에 도쿄도 고진초구(현 지요다구) 우치사이와이초의 NHK 도쿄방송회관 108호실을 접수하여 설치되었다.[11][12] 이 시점에서는 주로 CIE 관계자의 이용을 대상으로 했으나,[11] 이듬해 1946년 3월에 니토 홍차의 다실로 이전하면서 일본인에게도 개방되었다.[11]

1947년 8월 23일, CIE는 교토와 나고야에 CIE 도서관을 설치하는 지령 SCAPIN4401-A를 발표했고,[13] 같은 해 12월 30일에 발표된 SCAPIN5083-A에 의해 추가로 14개 도시에 설치하는 것이 통지되었다.[14] 이에 따라 1948년까지 인구 20만 이상인 16개 지방도시에도 CIE 도서관이 설치되어 총 17개관이 되었다.[12] 더욱이 1950년부터 1951년에 걸쳐 신주쿠, 나가노, 마쓰야마, 오카야마, 아키타의 각 관이 개관했고, 마지막으로 고쿠라시의 후쿠오카 CIE 도서관 기타큐슈 분관이 시의 요청으로 승격되어 총 23개관이 되었다.[2]

폐쇄와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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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로 연합군의 일본 점령이 종결됨에 따라 CIE 도서관은 폐쇄되었고, 이 중 13개 도시에서는 미국 국무부로 이관된 후 5월 1일부터 미국문화센터(ACC)로 개칭되었다.[15] 기본적인 서비스 내용은 이전과 같았으나,[16] 미국 정부의 홍보활동의 최전선을 담당하는 시설이 되어 영화 상영회, 전시회, 영어회화교실, 강연회, 인사교류사업에 중점이 두어졌다.[15] 이듬해 1955년에는 국무부에서 미국 홍보, 문화교류청으로 관할이 이관되었다.[17]

1967년 이후 예산 삭감으로 인해 7개의 센터가 폐쇄되어 1972년 시점에는 삿포로, 도쿄, 나고야, 교토, 오사카, 후쿠오카의 6개 도시만이 남게 되었다.[18] 1996년(헤이세이 8년)에 교토, 1997년(헤이세이 9년)에 삿포로의 센터도 폐쇄되었으나, USIA가 국무성에 통합된 1999년(헤이세이 11년)에는 삿포로의 센터가 재개되기도 했다.[18] 2006년(헤이세이 18년)에는 도쿄 아메리칸 센터의 자료실도 폐쇄되어 미국 대사관으로 이전했다.[18]

설비와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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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CIE 도서관의 개관 시 장서 수는 약 4,000권, 정기간행물이 약 400종 정도의 규모였으며,[2] 가장 큰 고베 CIE 도서관이 302평이었다.[2] 수용 인원은 오사카와 센다이가 최대로 각각 246명이었고, 반면 최소는 하코다테의 72명이었다.[2] 냉난방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2] 구마모토 CIE 도서관장을 지낸 그레이스 이이지마에 따르면, CIE 도서관의 과학, 기술 분야 장서는 미국의 일반적인 공공도서관보다 더 풍부했다고 한다.[19]

각각의 CIE 도서관에는 미국인 전문 사서가 1명씩 관장으로 배치되었고, 그 업무를 일본인 직원이 보좌하는 형태를 취했다.[20] 관장으로 일본에 온 사서 중 확인된 인원의 3분의 2가 여성이었다.[21]

CIE 도서관에서는 전쟁 전 일본의 도서관에는 없었던 무료 공개의 개가제를 채택하고, 참고 봉사, 도서관 간 상호대차, 아동 서비스 등을 실시하여[20] 전후 일본의 근대 공공도서관의 모델이 되었다.[22][16] 그 밖에도 영어회화교실, 영화 상영회, 레코드 콘서트, 강연회, 독서회, 토론회, 스퀘어 댄스, 펜팔 등 CIE 도서관에서 제공된 서비스는 다양했다.[20]

이용자는 미곡통장이나 학생증을 제시하면 대출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23] 도서, 잡지 외에도 레코드와 악보, 팸플릿류도 무료로 대출할 수 있었다.[2] 대출 기간은 도서가 2주, 잡지가 1주(단, 최신호는 1일)였다.[2]

오사카 CIE 도서관 개설 시 CIE가 발표한 담화에서는 기존 일본의 공공도서관에는 없는 CIE 도서관의 특징으로 입관 절차 불필요, 입관료 무료, 책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개가제, 자료 검색과 지도가 가능한 직원 배치, 찾기 쉬운 충실한 카드식 도서목록 등이 거론되었다.[24]

CIE 도서관은 22개 도시 23개관뿐이었지만, 그 외의 지역에도 분실을 설치하여 서비스를 전개했고,[20] 공공도서관, 대학도서관, 학교, 공장 등에 단체 대출도 실시했다.[20]

이용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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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당시의 도쿄 CIE 도서관의 입관자 수는 하루 1,200명 이상이었고, 지방에서는 400에서 500명 정도였다.[2] 이용자는 학생이 대부분이었다.[20] 이공계 잡지의 이용이 가장 많았고,[20] 의학, 토목, 전기, 자동차, 무선, 텔레비전 관련 잡지는 입수될 때마다 앞다투어 읽혔다.[23] 구미의 최신 과학기술을 알고 싶어도 당시 일본의 대학도서관에는 전쟁 전의 문헌밖에 없었고, 해외에서 자료를 가져오는 데도 수개월이 걸리는 상황에서 젊은 연구자들은 CIE 도서관에서 학술잡지를 탐독했다고 한다.[23] 이용자는 학생이나 연구자에 한정되지 않았으며, 미국의 패션 잡지는 주부와 여고생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23][25] CIE 도서관의 이용자였던 저명인으로는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마쓰야마 CIE 도서관), 공업디자이너 에쿠안 겐지(히로시마 CIE 도서관), 정신과 의사 나카이 히사오(오사카 CIE 도서관), 영문학자 유라 기미요시(도쿄 CIE 도서관) 등이 있다.[26][27]

1947년 10월 1일자 일본독서신문이 보도한 도쿄 CIE 도서관의 열람자 통계에 따르면, 하루 평균 열람자 수는 600명이었다.[28] 성별로는 남성이 85%, 여성이 15%였다.[28] 연령별로는 10대 이하가 21%, 20대가 65%, 30대 이상이 21%였다.[28] 직업별로는 학생이 55%를 차지했고, 엔지니어 14%, 과학자, 전문기술자 4%, 의사 3%, 작가와 편집자 및 신문기자 2%, 예술가 및 디자이너 2%, 관리 2%, 무직 4%였다.[28] 분야별 내역은 다음과 같다.

도쿄 CIE 도서관의 열람자 수 분야별 내역[28]
철학·심리·종교 교육 사회문제 정치·역사 경제·상업·노동 공예 미술·오락 문학 기타
도서 2% 4% 2% 18% 20% 20% 12% 16% 2%
잡지 2% 4% 10% 8% 4% 48% 16% 0% 8%

더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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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格子なき図書館』1950年 - CIEによるプロパガンダ映画(ナトコ映画)[29][30]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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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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