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 원년(기원전 206년), 하규(下邽)[1]에서 몸을 일으켜 낭중기장(郞中騎將)으로 고제를 따랐다. 이후 도위로서 양가(陽夏)를 쳤다.[2]
고제 5년(기원전 202년), 낭중으로서 해하 전투에서 진 서초패왕 항우를 추격해서 오강에 이른 한나라 군대 속에 있었다. 기사마 여마동이 항우와 대면하니 항우가 여마동에게 자기 목을 주겠다고 하고 자결했다. 한나라 군대가 서로 죽이기까지 하며 항우의 시체를 다투니, 이미 머리를 취한 왕예 외에 여마동·낭중기 양희·낭중 여승과 함께 항우의 시체 일부를 얻었고, 다섯 명이서 시체를 맞추어보니 맞아서 함께 제후가 되었다. 고제 8년(기원전 199년) 3월 신묘일에 오방후(吳房侯) 700호에 봉해졌다.[3] 재위 38년 만인 문제 12년(기원전 168년)에 죽어 시호를 장(莊)이라 하고, 아들 양거질(楊去疾)이 뒤를 이었다. 이 시호는 항우의 시체를 얻은 다섯 명이 공통으로 받았다.
↑사기 고조본기에 따르면, 고제가 양가에서 군사활동을 한 것은 원년 왕흡과 설구에게 왕릉과 합류해 패에 있는 아버지와 아내를 모셔오게 하니 항우가 양가에서 저지하게 한 것, 그리고 4년에 홍구 협약 후 항우를 뒤쫓다가 양가 남쪽에 머물면서 한신과 팽월의 합류를 기다린 것 두 가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