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덕황후 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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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왕씨 (중국어 정체자: 王皇后, 생년 미상 - 786년 12월 6일)는 당 덕종 이괄의 황후이며, 당 순종의 생모이다. 생전에 겨우 3일 동안만 황후자리에 있었다.
생애
[편집]왕씨의 생년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아버지는 비서감 왕우, 어머니는 정국부인 정씨이며, 형제로는 왕과가 있다. 당 현종 또는 당 숙종 시기에, 왕씨가 노왕 (이괄)의 빈이 되었다[1]. 761년, 이괄의 장남인 이송을 낳아, 총애를 받았다. 762년, 이괄의 장녀인 한국공주를 낳았다. 779년, 이괄이 황제에 즉위하자, 왕씨를 황후 다음 직위인 숙비로 책봉하고[2], 장남 이송을 태자로 세우고, 왕우를 양주대도독, 왕과를 미주사마로 추증하고, 조카 20여 명을 벼슬을 주었다. 783년, 경원병변(涇原兵变 (현재의 감숙성 핑량시))이 일어나자, 왕숙비는 전국옥새를 옷고름으로 묶어매고 덕종을 따라 봉천(현재의 섬서성 첸현)으로 피신했다[3]. 784년, 한국공주는 피난 도중 사망했고, 같은 해, 왕숙비는 장안으로 돌아왔다[4].
786년, 숙비의 병이 깊어지자, 12월 3일에 황후에 봉해졌고, 3일 후에 양의전에서 붕어하였다[5][6]. 787년 5월, 정릉에 묻혔다. 시호로는 소덕(昭德)이 내려졌다. 영정 원년 (805년) 11월, 황후는 정릉에서 숭릉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00년 동안, 당나라에는 황후가 세워지지 않았고, 멸망 직전에야 당 소종이 하황후를 책봉했다
가족관계
[편집]- 아버지 : 왕우 - 비서감. 당 덕종이 왕우를 양주대도독으로 증직함
- 어머니 : 정씨 - 정국부인으로 봉해지고, 왕황후가 사망하자, 정씨가 제사를 청하자, 당 덕종이 "제연으로 가짜 화과를 쓰지 말고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고, 이때, 종실의 여러 친척들과 이성(李晟), 혼우(浑瑊), 신책 6군 대장들이 함께 제사를 지냈다.
- 배우자 : 당 덕종 이괄
각주
[편집]- ↑ 양당서의 왕황후전은 그녀가 이(괄)에게 시집갔을 때, 이(괄)은 이미 노왕이라 암시했다. 그러나, 762년, 당 대종이 즉위하면서 이(괄)은 비로소 노왕에 봉해졌다. 이송은 761년에 태어났다. 자치통감 권222 참조
- ↑ 구당서 권 51
- ↑ 백양이 쓴 『백양판 자치통감』에서 『자치통감』에 기록된 전국옥새를 옷고름에 묶은 왕귀비, 즉 왁숙비, 즉 훗날 왕황후라 쓰여있다.
- ↑ 자치통감 권228
- ↑ 《구당서 권52, 열전제2, 후비 하》. 2022년 9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2년 9월 27일에 확인함.
정원 2년, 비가 병에 걸렸다. 11월 갑오, 황후로 책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의전에서 붕어했다(貞元二年,妃病。十一月甲午,冊為皇后,是日崩於兩儀殿。)
- ↑ 《자치통감 권232》. 2022년 9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2년 9월 27일에 확인함.
11월, 갑오, 숙비 왕씨를 황후로 봉했다. 을미, 한황이 입조했다. 정유, 황후가 붕어했다(十一月,甲午,立淑妃王氏為皇后。乙未,韓滉入朝。丁酉,皇后崩。)
참고자료
[편집]- 『구당서』 권52ㆍ열전제2ㆍ후비전
- 『신당서』 권77ㆍ열전제2ㆍ후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