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세 쇼린
마나세 쇼린(일본어: 曲直瀬正琳 まなせ しょうりん[*])은 일본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 초기의 의사이다. 마나세 도산(曲直瀬道三)에 입문하여 승려가 되었고 의술을 인정받아 가문을 잇게 되었다.
이후 도요토미 씨를 섬기며 오기마치 상황, 고히메, 고요제이 상황 등의 질병을 치료했다. 그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에도로 이주, 에도 막부의 오의사(奥医師) 요안인 가(養安院家)의 시조가 되었다.
생애
[편집]이요 국의 무장 히토쓰야나기 노부마사(一柳宣高)의 먼 후손인 조신(恕心)의 아들이라 전한다.[1] 덴쇼 4년(1576년) 마나세 쇼세이(초대 도산)에 입문,[2] 덴쇼 10년(1582년) 머리를 깎고 요안(養庵)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3] 또한 마나세 도산의 손녀로 마나세 겐사쿠(2대 도산)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2]
덴쇼 12년(158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하고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섬기게 되었으며, 분로쿠 원년(1592년) 1월, 히데쓰구로부터 오미 국 250석을 하사받았다.[1] 또한 분로쿠 원년(1592년) 오기마치 상황의 질병에 대해 약을 헌상하였으며 이에 상황이 회복되었으로 12월 28일 호인(法印)이 되었고, 이때 천황의 명으로 요안(養庵)을 요안(養安)으로 개명하였다.[3] 요안(養安)이라는 글자는 《순자》를 따른 것이다.[3] 분로쿠 4년(1595년) 히데요시의 명으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아내 고히메를 치료하고 보상으로 임진왜란에서 조선으로부터 약탈해 온 책이나 히슈 노부이에(備州信家)가 제작한 창칼을 하사했다.[1]
게이초 5년(1600년) 4월 26일 고요제이 상황을 치료하고 원호(院号)를 허락받았다.[1] 게이초 8년(1603년) 쇼린안(正琳庵), 훗날 교쿠린인(玉林院)이라 불리게 될 사찰을 창건했다.
게이초 10년(1605년),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슨푸, 에도로 옮겨 게이쵸 13년(1608년)부터 이마오지 지카키요(今大路親清), 나카라이 나리노부(半井成信), 야쿠인 소하쿠(施薬院宗伯)와 함께 반년에 한 번씩 에도로 가서 시의로써 일하였다.[1]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어번을 마치고 쇼린은 관직에서 물러났다. 게이초 16년(1611년) 8월 9일 사망하여(향년 47세) 교토의 쇼린인(正琳院)에 묻혔다.[1]
요안인 문고(養安院文庫)
[편집]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총사령관이었던 우키다 히데이에는 조선의 경복궁의 교서관(校書館) 주자소(鑄字所)를 습격하여 조선의 금속활자 20만 자와 인쇄기구 및 당시 조선 왕실에서 소장하고 있던 조선과 중국의 여러 서적을 약탈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진상하였다. 히데요시는 이 가운데 일부를 1595년 마나세 쇼린에게 주었는데, 이때 하사받은 서적을 토대로 쇼린은 요안인 문고(養安院文庫)를 설치하였다.[4]
막말에서 메이지 초기에 걸치는 19세기의 혼란상 속에서 요안인 문고는 산일되어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일본 구마모토현립 진기치(仁吉) 고등학교와[5] 나라현의 덴리(天理)대학 도서관에 요안인 본(養安院本)이라는 이름으로 일부 소장되어 있으며, 요안인 문고의 장서목록인 회천루 서목(懷遷樓書目)은 현재 일본 내각문고에 소장되어 있다.[6] 도쿄 대학 사료편찬소에도 옛 요안인 장서본(舊養安院藏書本) 《해동제국기》 사본이 소장되어 있다.[7]
요안인 문고에는 조선과 중국의 의학 서적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요안인장서(養安院藏書)라는 쇼린 자신의 장서인이 찍혀 있다.[8][9] 요안인 문고 소장 장서에는 《치종비방》(治腫秘方)이나 《심도》(心圖, 베이징 대학 도서관 소장)처럼 조선에는 남아 있지 않은 서적도 존재하며, 《의방유취》(醫方類聚)[10]나 《입학도서》처럼 조선 말기나 일제강점기 때에 조선에 역반입되어 규장각에서 소장하게 된 책도 있다.
요안인 문고 소장 도서 가운데는 중국으로 흘러간 책도 있어서, 중국 베이징 대학교 도서관 소장 도서 가운데에도 요안인 장서에 속해 있던 서적으로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주세붕이 쓴 《심도》와 함께 《격재갱운당송현시》(格齋賡韻唐宋賢詩)와 《삼략직해》(三略直解)가 소장되어 있다.[11] 조선 초기 김시습이 지은 전기소설 《금오신화》도 요안인 문고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 요안인 문고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산일되고 메이지 시대의 여러 수집가들을 거쳐 중국으로까지 건너가게 된 것을 1924년에 최남선이 발견하여 다시 조선에 소개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12]
요안인 문고 소장 장서 가운데 중국 문헌인 《통전》(通典)과 《성해》(姓解), 《중설주》(中說注), 《중광회사》(重廣會史) 《신조입전설문정자》(新雕入篆說文正字) 등 5종은 고려 왕실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서적으로 확인되었다.[13]
친족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간세이 중수제가보』권제593
- ↑ 가 나 (일본어) 『曲直瀬正琳』 - Kotobank
- ↑ 가 나 다 町泉寿郎 (2009). “曲直瀬養安院家と朝鮮本医書” 2 (1). 日本思想文化研究.
- ↑ 李俊杰 (1986). 《朝鮮時代 日本과 書籍交流 硏究》. 弘益齋. 181쪽.
- ↑ 구마모토 현립 진키치 고등학교(일본어)
- ↑ (역사이야기) 일본에 의한 조선본의 약탈에 대하여-(4)
- ↑ 신숙주 지음, 탁양현 엮음(2018) 《15세기 신숙주의 일본 여행기, 해동제국기》 e퍼플
- ↑ 요안인장서(고려대학교 해외한국학자료센터)
- ↑ 曲直瀬正琳
- ↑ (천자칼럼) "의방유취" 한국경제 1996년 1월 21일
- ↑ 김윤재 (1996). “『심도』해제” (PDF). 《규장각》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19): 180쪽.
- ↑ 김시덕(2020) 《일본인 이야기.1: 전쟁과 바다》 메디치미디어
- ↑ “고려 왕실도서관 존재 확인”. 《한겨레》. 2001년 6월 19일. 2021년 8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1년 8월 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편집]- 曲直瀬正琳 - 国文学研究資料館蔵書印データベース 2021年5月2日閲覧。
- 역사교육 > 동아시아의 역사 >제4장 국제질서 변화와 독자적 전통의 형성 >16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전쟁 >임진전쟁이 남긴 것 >문물의 교류(동북아역사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