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종 (고려)
희종
熙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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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고려 국왕 | |
재위 | 1204년 1월 5일 ~ 1211년 12월 25일 (음력) |
즉위식 | 개경 대관전 |
전임 | 신종 |
후임 | 강종 |
고려국 왕태자 | |
재위 | 1200년 4월 15일 ~ 1204년 1월 5일 (음력) |
전임 | 왕태자 숙 (강종) |
후임 | 폐태자 지 (창원공) |
이름 | |
휘 | 왕영(王韺) · 왕연(王淵) · 왕덕(王悳) |
이칭 | 자 : 불피(不陂) |
묘호 | 희종(熙宗) · 정종(貞宗)[1] |
시호 | 성효인목성효대왕(誠孝仁穆誠孝大王) |
능호 | 석릉(碩陵)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182 |
신상정보 | |
출생일 | 1181년 5월 8일(음력) |
출생지 | 고려 개경 |
사망일 | 1237년 8월 10일(음력) | (56세)
사망지 | 고려 강화 법천정사 |
부친 | 신종 |
모친 | 선정왕후 김씨 |
배우자 | 성평왕후 임씨 · 폐태자비 왕씨 |
자녀 | 5남 5녀 |
희종(熙宗, 1181년 6월 21일 (음력 5월 8일) ~ 1237년 8월 31일 (음력 8월 10일))은 고려의 제21대 국왕(재위: 1204년 ~ 1211년)이다.
개요
[편집]휘는 영(韺), 자는 불피(不陂), 묘호는 희종(熙宗), 시호는 인목성효대왕(仁穆成孝大王) 능호는 석릉(碩陵)이다. 신종과 선정왕후의 맏아들이다.
재위 기간 최충헌이 실권을 잡았으며,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치는 바람에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었다.[2]
생애
[편집]탄생
[편집]1181년(명종 11년) 5월 8일, 인종의 다섯째 아들인 익양공(신종)과 부인 김씨(선정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1197년(명종 27년), 큰아버지인 명종이 최충헌 형제에 의해 폐위되고, 아버지 평량공이 추대되면서 입궁하였다.
즉위
[편집]1200년(신종 3년), 태자에 책봉되고, 1204년(신종 7년), 신종의 양위를 받아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1205년(희종 1년), 최충헌(崔忠獻)을 진강군 개국후(晋康郡 開國侯)에 봉하였으며 1206년(희종 2년), 다시 진강후(晋康侯)에 봉하고 흥녕부(興寧府)를 세우게 하였으며 1207년(희종 3년) 최충헌의 청으로 유배자 300여명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 방면하였다.
1208년(희종 4년) 개경 대시(大市) 좌우의 긴 행랑(行廊) 1,080영(楹)을 다시 짓게 하였는데 오부방리(五部坊里)와 양반의 집에서 곡식을 차출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폐위
[편집]1211년(희종 7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당시 정권을 휘두르던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였다.[3]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어 강화로 쫓겨났다.[2] 뒤이어 자란도(紫鸞島)로 옮겨졌고 1215년(고종 2년) 다시 교동으로 옮겨졌다가 1219년(고종 6년) 개경에 봉영(奉迎)되었다.
1227년(고종 14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최우(崔瑀)에 의하여 다시 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져 1237년(고종 24년)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승하하였다.
시호는 성효(誠孝)이며 능은 강화도 양도면에 위치한 석릉(碩陵)이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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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편집]
왕비[편집]
왕자[편집]
왕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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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종이 등장하는 작품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김중구 묘지명》 (1244년)
- ↑ 가 나 《고려사》 권21, 세가 권제21, 희종(熙宗) 7년(1211년) 12월 25일 (계묘)
최충헌이 왕을 폐위시키고 왕정을 옹립하다 - ↑ 《고려사》 권21, 세가 권제21, 희종(熙宗) 7년(1211년) 12월 22일(경자)
최충헌 암살 시도가 실패하다
12월 경자, 내시(內侍) 왕준명(王濬明) 등이 최충헌(崔忠獻)을 죽이려고 모의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 ↑ 인종의 넷째 딸인 영화궁주의 아들
- ↑ 명종과 광정태후의 둘째 딸로, 희종과는 사촌지간이다.
- ↑ 《고려사》 권129, 열전 권제42, 반역(叛逆), 최충헌(崔忠獻)
최충헌이 최충수를 처단하여 권력을 독점하다
이전에 태자(희종)가 창화백(昌化伯) 왕우(王祐)의 딸을 비(妃)로 맞았는데, 이때에 와서 최충수(崔忠粹)가 자신의 딸을 태자에 바치려고 왕에게 굳이 청하니, 왕(신종)이 좋아하지 않았다.최충수가 거짓으로 내인(內人)에 말하기를,
“왕께서 이미 태자비를 내보내시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내인이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어쩔 수없이 태자비를 내보내었다.
태자비가 흐느껴 울고 목이 메이기를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니, 왕후(선정왕후)도 눈물을 흘렸으며 궁중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 ↑ 인종의 셋째 딸인 창락궁주의 아들
- ↑ 명종과 광정태후의 장녀이며, 희종과는 사촌지간이다.
- ↑ 최충헌의 아들
- ↑ 희종의 동생인 양양공 왕서의 아들
제21대 고려 국왕 | ||
전 임 신종 |
1204년 ~ 1211년 | 후 임 강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