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능선
고능선 高能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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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고능선 |
로마자 표기 | Go Neung-seon |
출생 | 1842년 |
사망 | 1926년 |
국적 | 조선 |
직업 | 성리학자 |
소속 | 화서학파 |
고능선(高能善, 1842년(헌종 8) ∼ 1926년)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며, 학맥으로는 화서학파에 속한다. 호는 후조(後凋), 별칭은 산림(山林)이며,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다른 이름은 고석로(高錫老)이며, 유중교의 제자이자 김구·안명근의 스승이었다.
생애
[편집]아버지는 고처행(高處行)이고, 어머니는 장흥 김씨로 김노혁(金魯赫)의 딸이다.
고산림(高山林)이라는 별칭도 있었다.[1] 1880년대 후반에 3년간 강원도 춘천군 가정리 가정서사에서 성재 유중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화서학파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하고 평범한 유학자로 남았다.[2] 유중교는 화서 이항로의 제자였고, 면암 최익현과 동문이었다.
그 뒤 안태훈의 초청으로 신천에 가, 청계동과 인근의 학동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는 안태훈의 모친과 같은 제주 고씨라는 인연으로 1893년 2월에 해주부에서 신천군 청계동으로 이주하여 초당을 짓고 생활하였다.[2] 1895년 초 안태훈의 산채로 피신온 김구를 만났다. 안태훈의 소개로 청년 김구를 그에게 배알케 하고, 그의 약력을 소개받았다.[1]
1895년 2월부터 5월까지 백범 김구는 그의 각별한 애호를 받으며, 구전심수를 통해 주자학적 애국사상과 민족주의 교육을 받았다.[2][3] 안태훈은 자신과 사상적 정향이 다른 그를 종종 방문하여 주거니 받거니 고금의 일을 강론하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김구는 양인의 담론을 듣는 재미를 만끽하였다.[4] 고능선은 김구에게 청나라로 가서 의병활동을 할 것을 권고하기도 하였다.[5]
그 뒤 안태훈 일가와 종교적 문제로 갈등하다가 단발령을 계기로 청계동을 떠났다.[6] 고능선은 후일 콜레라로 장자 원명 내외를 잃고, 그의 장자 원명의 딸과 김구의 혼약을 주선하였다. 그러나 함지박을 팔던 시장 상인 김치경(金致景)이 와서 횡포를 놓는 바람에 혼약은 없었던 일로 하게 되었다.[7]
저서
[편집]- 《후조문집》(後凋文集)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김구 《백범일지》(김구 저, 도진순 엮음, 2007, 개정판, 돌베개) 59쪽.
- ↑ 가 나 다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38쪽.
- ↑ 김구 《백범일지》(김구 저, 도진순 엮음, 2007, 개정판, 돌베개) 65~66쪽.
- ↑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39쪽.
- ↑ 김구 《백범일지》(김구 저, 도진순 엮음, 2007, 개정판, 돌베개) 67쪽.
- ↑ 김구 《백범일지》(김구 저, 도진순 엮음, 2007, 개정판, 돌베개) 87쪽.
- ↑ 김구 《백범일지》(김구 저, 도진순 엮음, 2007, 개정판, 돌베개) 84~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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