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노데
가브리엘 노데(Gabriel Naudé, 1600년 2월 2일 - 1653년 7월 10일)는 프랑스의 사서이자 학자이다. 그는 정치, 종교, 역사, 초자연적 현상 등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쓴 다작 작가이다. 1627년에 쓴 저서 <<도서관 설립법>>(Advice on Establishing a Library)은 도서관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후에 쥘 마자랭 추기경의 도서관을 설립, 운영하면서 <<도서관 설립법>>에 있는 모든 이론을 실천할 수 있었다. 노데는 피에르 벨과 퐁트넬의 선도자이다.
생애
[편집]노데는 1600년 프랑스 파리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정부의 하급관료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문맹이었다.[1] 그는 교사로서의 그의 교육에서의 끈기와 열정으로 서술될 수 있다. 노데는 젊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였고, 거기서 철학과 문법을 배웠다.[2] 그는 나중에 파리와 파두아에서 약학을 전공하였고, (그가 Cesare Cremonini의 수업을 참여한 곳), 루이 13세의 내과의사가 되었다.
20살의 나이로, 그는 처음으로 Le Marfore ou Discours Contre les Lisbelles라는 저술을 펴낸다.[3] 그 저술로 그는 당시 파리 고등법원의 의장이었던 Henri de Mesme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래서 Mesme는 노데에게 그의 개인 사서 자리를 제안하였다. Mesmes는 당시에 약 8000권 규모의 큰 개인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도서관은 적절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모든 학자들에게 열린 도서관이었다.[4] Mesme의 도서관에서 노데가 했었던 사서로서의 일은 나중에 그가 쓴 또 다른 저술인 Advice on Establishing a Library을 쓸 경험을 주었다. 노데는 Mesme를 위해 그가 그의 도서관을 짓고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Advice라는 저술을 펴낸다. 1629년에 그는 로마에 있는 Guidi di Bagno 추기경의 사서가 된다. 그리고 Bagni's death가 있었던 1641년에 Francesco Barberini 추기경의 사서가 된다.
Richelieu추기경 의 열망으로, De Imitatione Christi에 대한 Jean Gerson의 권위를 거부하면서 그는 Order of Saint Benedict와 논란을 겪기 시작한다. Richelieu는 노데가 그의 사서가 되길 원했으나, Richelieu가 죽음으로써 노데가 Mazarin추기경 에게 온 비슷한 제안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 이후로 10년동안 그는 Bibliothèque Mazarine'라고 알려진 유럽의 모든 귀족들이 모은 책들을 모으는데 전념한다.
각주
[편집]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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