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화
한동화 韓東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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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5년 9월 30일 대한민국 |
국적 | 대한민국 |
경력 | 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MBC 청룡 코치, 청보 핀토스 코치, 롯데 자이언츠 코치, 신일고등학교 감독, 충암고등학교 감독, 베이징 타이거스 감독 |
직업 | 야구인 |
병역 | 해병대 |
한동화(韓東和. 1945년 9월 30일 ~)는 대한민국의 야구인이다. 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현역 시절에는 최고의 2루수로 꼽혔다. 선린상고 시절부터 활약하기 시작해 실업 무대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해병대 소속으로 실업 무대 MVP를 수상했다. 도루상과 득점상을 타는 등, 발 빠른 야구를 구사했던 선수였다. 제일은행 야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은퇴 후 신일고등학교, 충암고등학교 감독을 역임했다. 신일고등학교 감독을 맡았을 때 그의 손을 거쳤던 대표적인 선수로는 외야수 박흥식이 있다.[1]
이후 MBC 청룡의 코치를 시작으로 1986년 청보 핀토스에 이적했으며 1987년 후 팀이 태평양으로 넘어가면서 친정인 MBC 코치로 자리를 옮겼고[2] 1989년 말 부임한 김진영 감독의 부름을 받아 롯데 자이언츠 코치를 맡았지만 김진영 감독이 1990년 시즌 중 성적부진으로 경질된 데다 같은 해 말 강병철 감독이 재부임하면서 소위 '김진영 라인' 지우기의 일환에 따라 물러난 후[3] 한동안 현장을 떠났다가 1992년 시즌 뒤 쌍방울 레이더스의 수석코치로 합류하게 되나 외국인 선수 영입과정에서 불화를 보인 끝에[4] 결국 신용균 감독이 퇴진하고, 1994 시즌부터 팀을 지휘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프런트, 특히 구단의 실세인 이용일과의 갈등이 심했다고 했는데 매년 유망주들을 쌍방울과 1992년 11월 3일부터 자매결연을 맺은[5] 일본프로야구 팀인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가을 캠프에 보내던 관례를 거부한 것이[6] 대표적이었다. 게다가, 한동화 감독의 전임인 신용균 감독과 마찬가지로 일본통이었던 이용일 당시 구단주 대행은 쌍방울의 첫 감독이었던 김인식 감독과도[7]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결과 1995 시즌 연패를 거듭하며 하위권으로 추락. 결국 1995년 5월 16일 감독에서 해임되었고[8] 프런트에게도 책임을 물어 사장과 단장이 동시에 해임되었다.
해임된 뒤, 신일고 감독으로 20년 만에 복귀했으며 프로야구 감독 출신이 고교 야구 감독을 맡는 첫 번째 사례였다. 1997년 신일고의 전국대회 3관왕을 이끌면서 지도력을 보였다. 그 당시 밑에 있던 선수들이 봉중근, 현재윤, 안치용, 김광삼이었다. 그리고 휘문고등학교 감독도 이어서 역임했다.
한동안 야구계에서 떠나 있다가 중국 프로야구 베이징 타이거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야구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곧 그만두게 된다.
출신 학교
[편집]각주
[편집]- ↑ 박흥식 “내가 찍은 물건은 김문호-김대우…절실함 있잖아” - 스포츠동아
- ↑ “韓東和(한동화)코치 MBC로 옮겨”. 동아일보. 1987년 12월 15일. 2019년 6월 12일에 확인함.
- ↑ 정의길 (1990년 11월 3일). “프로야구 무원칙'감투바꿔쓰기'성적부진·구단불화 빌미 4구단 물갈이”. 한겨레신문. 2019년 6월 12일에 확인함.
- ↑ 김경윤 (2015년 7월 31일). “[시공초월 라이벌]쌍방울 VS 한화, 만년 꼴찌 탈출기”. 스포츠서울. 2019년 5월 31일에 확인함.
- ↑ “프로야구 단신”. 연합뉴스. 1992년 11월 2일. 2020년 7월 16일에 확인함.
- ↑ “<감독해부>8.끝 쌍방울 한동화”.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2020년 7월 16일에 확인함.
- ↑ 여현호 (1993년 8월 10일). “한국체육 이대로 좋은가 (58) 프로선수 빛과 그늘〈9〉툭하면 해임'파리목숨'감독”. 한겨레신문. 2019년 5월 31일에 확인함.
- ↑ “쌍방울,사장.단장.감독 경질”. 연합뉴스. 1995년 5월 16일. 2020년 7월 16일에 확인함.
전임 신용균 |
제3대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1994년 ~ 1995년 |
후임 김우열 (감독 대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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