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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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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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89년 |
사망 | 1745년 |
국적 | 조선 |
별칭 | 자 영백(永伯), 호 약산(藥山) 시호 충장(忠章) |
학력 | 1719년 증광시 문과 급제 |
직업 | 문신 |
종교 | 유학 |
배우자 | 안동 권씨 |
자녀 | 2남 |
오광운(吳光運, 1689년 8월 23일 - 1745년 7월 21일)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영백(永伯), 호는 약산(藥山), 시호는 충장(忠章)이다. 예조참판을 역임하였고, 무신란에 관계된 공로를 참작하여 사망 직후 이조판서 겸 대제학 관직이 추증되었다.[1] 당파로는 청남(淸南) 준론(峻論)에 속하였다.
경력
[편집]- 1714년(숙종 40년), 소과 과거시험 생원시 합격[2]
- 1719년(숙종 45년), 증광시[3] 문과 과거시험 급제, 승문원 관직 임명
- 1723년(경종 3년), 문신 정시(庭試) 과거시험 급제, 정6품 예조 좌랑 임명
- 1728년(영조 4년) 2월, 홍문관 정6품 수찬 임명, 4월에 승정원 정3품 당상관인 동부승지로 발탁됨
- 1733년(영조 9년) 5월, 한성부 종2품 우윤 임명
- 1738년(영조 14년), 50세를 맞이하여 자신이 지은 시문(詩文)을 정리함
- 1741년(영조 17년) 9월, 형조 종2품 참판 임명
- 1742년(영조 18년) 12월, 예조 종2품 참판 임명
- 1743년(영조 19년) 7월, 사헌부 종2품 대사헌 임명
- 1744년(영조 20년) 11월, 개성부 종2품 유수 임명
- 1745년(영조 21년) 7월, 사망 (정2품 이조판서와 대제학 관직이 증직됨)
- 1788년(정조 12년) 4월, 시호 충장(忠章)이 내려짐[4] (채제공이 시호를 청하기 위한 문서인 시장을 지었음)
가족
[편집]- 고조부 : 예조판서 오준(吳竣, 1587년 ~ 1666년)[5]
- 고조모 : 진주(晉州) 유씨(柳氏) - 진사 유시회(柳時會)의 딸
- 증조부 : 의금부도사 오정한(吳挺漢)
- 증조모 : 은진(恩津) 송씨(宋氏) - 현감 송지휘의 딸
- 조부 : 오시봉(吳始鳳)
- 조모 : 양천(陽川) 허씨(許氏) - 승지 허정(許珽)의 딸
저서
[편집]- 약산만고(藥山漫稿)
각주
[편집]- ↑ "공이 사직(社稷)에 있어 상훈(賞勳)을 내렸어야 마땅하였는데, 상훈을 내리지 못하였다. 오광운과 홍경보에게 모두 정경(正卿, 판서)을 특별히 증직(贈職, 추증)하고..." 《조선왕조실록》 영조 62권, 21년(1745년) 7월 21일 3번째 기사
- ↑ 이하 경력은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오광운의 신도비 비문 기록을 간추린 것이다. 신도비문은 조현명의 문집인 《귀록집(歸鹿集)》 16권에 〈증이조판서오공신도비명(贈吏曹判書吳公神道碑銘)〉으로 실려 있다.
- ↑ 증광시(增廣試) 과거시험은 나라에 특별한 경사가 있을 때 시행하는 과거 시험이다.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과거 시험인 식년시(式年試)에 준하는 절차와 규모로 시행된다. 오광운은 당시 시험에서 병과 제15인, 즉 전체 합격자 35명 가운데 25등이었다.
- ↑ 앞서 3월 1일에 무신년 정변의 충신과 공신 명단을 책자로 정리해 수록하면서 오광운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하명한 결과였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25권, 12년(1788년) 4월 6일 3번째 기사
- ↑ 이하 가계 역시 조현명이 지은 오광운의 신도비 비문에 나타난 기록을 간추린 것이다.
- ↑ 진사 2등 제9인 합격 (전체 합격자 100명 중 14등), 1689년 〈기사증광사마방목(己巳增廣司馬榜目)〉, 국립중앙도서관
- ↑ 당시 과거시험에서 10명이 선발되었는데, 1등으로 합격하였다. 출전은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규장각한국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