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필원
보이기
서필원
徐必遠 | |
---|---|
이름 | |
자 | 재이(載邇) |
호 | 육곡(六谷) |
시호 | 정의(貞毅) |
신상정보 | |
출생일 | 1614년 |
사망일 | 1671년 |
국적 | 조선 |
경력 | 충청도 관찰사 한성부판윤 형조 판서 병조 판서 |
본관 | 부여(扶餘) |
부친 | 서운기(徐雲驥) |
모친 | 이씨 |
배우자 | 전주 이씨 |
자녀 | 서경조(徐敬祖) |
서필원(徐必遠, 1614년~1671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재이(載邇), 호는 육곡(六谷), 시호는 정의(貞毅)이다.[1]
생애
[편집]만죽헌(萬竹軒) 서익(徐益)의 증손이다. 1633년(인조 11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1643년 창릉참봉·사옹원봉사가 되었다. 1648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관을 거쳐 예문관검열과 설서(說書)를 역임하였고,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사간원 정언 겸 춘추관 기사관(行司諫院正言兼春秋館記事官)으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2]
1654년(효종 5) 홍문관부수찬, 사간원헌납,[3] 이조좌랑,[4] 평안도어사를 역임하였다.
1656년 수찬, 사헌부지평, 홍문관교리, 이조정랑 등을 지내고,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서원의 폐단을 보고하고 그 개혁을 청하였다.[5]
1657년 대사간,[6] 1658년 승지를 거쳐 전라감사가 되어서 대동법(大同法) 시행에 찬동하여 전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을 반포하였다.
현종 초에 병조참의·승지·대사성·예조참의·이조참의 등을 거쳐, 1663년(현종 4) 대사간·승지·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목면 재배를 권장하고 구휼 사업에 힘쓰기도 하였다.[7] 특히 육진혁막제조(六鎭革瘼諸條)를 올려 그 지방의 폐단을 개혁하는 데 앞장섰다.
1665년 강화유수를 역임하고, 1668년 자헌대부에 승진하여 형조 판서가 되었다.[8] 1671년 병조판서에 이르렀다.[9] 시호는 정의(貞毅)이다.[10][11]
저서
[편집]- 《육곡유고(六谷遺稿)》
각주
[편집]- ↑ 서필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인조실록 1권, 편수관 명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효종실록 12권, 효종 5년 4월 18일 정축 2번째기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효종실록 13권, 효종 5년 10월 30일 병술 2번째기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효종실록 18권, 효종 8년 6월 21일 임진 3번째기사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효종실록 19권, 효종 8년 12월 4일 임신 1번째기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현종실록 7권, 현종 5년 1월 29일 임진 4번째기사”. 2016년 6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5월 22일에 확인함.
- ↑ “현종실록 15권, 현종 9년 11월 11일 병오 4번째기사”. 2016년 6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5월 22일에 확인함.
- ↑ “현종실록 19권, 현종 12년 6월 14일 계사 3번째기사”. 2016년 6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5월 22일에 확인함.
- ↑ “영조실록 79권, 영조 29년 4월 23일 무신 2번째기사”. 2016년 6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5월 22일에 확인함.
- ↑ 서필원이 죽기 직전에 영의정에는 허적이, 좌의정에는 정치화가, 우의정에는 송시열이 앉아있었고 이조판서에는 김수항이, 호조판서에는 김수흥이, 예조판서에는 정지화가, 병조판서에는 서필원이, 형조판서에는 민희가, 공조판서에는 박장원이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