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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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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신우(方臣祐: 1267년~1343년 10월 16일(음력 9월 28일)[1][2])는 고려 후기의 환관이다. 어릴 때 이름은 방소공(方小公)이며 본관은 상주다. 벼슬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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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모현(지금의 경상도 상주) 아전을 지낸 방득세(方得世)의 아들로 태어나 제국대장공주의 시중을 들기 위해 원나라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망쿠다이[忙古台]라는 몽골식 이름을 받았다. 원 무종의 모후인 수원황태후(壽元皇太后)의 시중을 들며 장작원사(將作院使)에서 평장정사(平章政事)가 되는 등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했다. 충선왕이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즉위를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벽상삼한정광(壁上三韓正匡)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요양행성우승(遼陽行省右丞) 홍중희(洪重喜)가 충선왕을 헐뜯는 보고를 하자 원 황실에 이것이 무고임을 주장해 홍중희를 귀양 보냈다.[1][3]

1310년(충선왕 2) 수원황태후의 명을 받아 고려에 돌아와 금자대장경을 만드는 일을 감독하였다.[4] 이 장경이 완성되자 신효사(神孝寺)로 옮기고 수원황태후의 무병장수를 빌었으며[5]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사면하기도 했다.[3] 충선왕은 방신우의 공을 인정해 중모군(中牟君)에 봉했다.[6] 이어 태자첨사(太子詹事)가 되었고, 다시 휘정원사(徽政院使)를 거쳐 저경사사(儲慶司使)가 되었다.[3]

번왕(藩王) 팔로미사(八驢迷思)가 원나라에 귀순하자 원나라에서는 그를 압록강 동편에 이주시키려 하였는데, 방신우가 이를 말려 중지시켰다. 좌상(左相) 도라사가 고려를 원나라의 일개 성(省)으로 편입시키려는 논의가 있자 이를 중지시켜 고려를 지킨 공으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지고 추성돈신양절공신(推誠敦信亮節功臣)에 책록되었다.[3]

방신우의 지위를 바탕으로 그 아버지, 매부, 생질이 높은 벼슬에 올라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방득세(方得世)는 상주목사(牧使)가 되고 매부 박려(朴侶)는 첨의평리(僉議評理)의 높은 벼슬을 받고, 박려의 아들 박지정(朴之貞)은 전서총랑에 올랐다. 그리고 강남(江南)의 토지 4천 무(畝)를 하사받는 등 막대한 부를 쌓았다.[3]

1330년(충숙왕 17)에 귀국해 선흥사(禪興寺)를 웅장하게 중수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원나라에 건너가 이듬해인 1343년(충혜왕 복위 4) 음력 9월 28일 그곳에서 죽었다. 방신우의 주검은 고려로 돌아와 자신이 중수한 선흥사(禪興寺)에 묻혔다.[1]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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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조할아버지: 방우현(方佑賢) - 하남사(河南使)로 증직
    • 할아버지: 방량(方亮) - 하남군공(河南郡公)에 증직
      • 아버지 : 방득세(方得世) - 영록대부 주국(榮祿大夫柱國) 지냄, 의국공(義國公)
      • 어머니: 의국대부인(義國大夫人) 김씨[7]
        • 본인: 방신우(方臣祐)
        • 아내: 의국부인(義國夫人) 이씨(李氏) - 개성판관(開城判官) 이광시(李光時)의 딸
        • 매부: 박려(朴侶)
          • 생질: 박지정(朴之貞)

방신우가 등장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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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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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현, 《익재난고》 권7, 광록대부 평장정사 상락부원군 방 공 사당비(光祿大夫平章政事上洛府院君方公祠堂碑)
  • 《고려사》 권122, 〈열전〉35, [환자], 방신우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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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
  • 《고려사절요》
  • 《익재난고》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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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제현, 《익재난고》 권7, 光祿大夫平章政事上洛府院君方公祠堂碑
  2. 이 글은 이제현이 1345년(충목왕 원), 곧 방신우가 죽은지 이태(2년) 뒤에 지은 것이다.
  3. 《고려사》 권122, 〈열전〉35, [환자(宦者)], 방신우
  4. 《고려사》 권33, 〈세가〉33, 충선왕 2년(1310) 6월 6일(임자)
  5. 《고려사절요》 권23, 충선왕 2년(1310) 7월
  6. 《고려사》 권33, 〈세가〉33, 충선왕 2년(1310) 9월 11일(을유)
  7. 외할아버지(어머니의 아버지)의 이름은 사료에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