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도덕성’과 ‘정치개혁’을 언급하지 않고 그 이름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이름은 한국 정치사에 정치개혁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노무현식 정치개혁’을 가장 든든하게 뒷받침했던 것이 바로 도덕성이었다. ‘비주류 정치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세운 것도 도덕성이고, 숱한 정치적 위기에서 그를 구해낸 힘도 도덕성에서 비롯됐다.
역설적으로, 검찰과 언론 그리고 여권이 지난 6개월간 집요하게 그를 공격한 부분도 역시 도덕성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600만 달러 수수 의혹이 불거졌고, 그는 이 가운데 100만 달러를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이렇게 말하는 게 구차하지만 그래도 진실이니 어쩔 수 없다며 “나는 몰랐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세상은 억대 명품 시계 수수 의혹과 자녀들의 미국 저택 매입 문제를 추가로 들춰냈다.
검찰 수사로 내려진 ‘도덕적 파산선고’사건의 핵심인 600만 달러 수수 의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지 여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검찰이 이대로 수사를 종결한 만큼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앞으로도 영영 묻힐 가능성이 높다. 대신 지난 6개월간의 검찰 수사와 언론 보도를 통해 이미 그는 ‘도덕적 파산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덕성을 강조한 정치인이 스스로 도덕주의의 덫에 걸려 몰락했다’는 것이 대다수 언론의 시각이다. 이런 식의 이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이 노 전 대통령 본인에게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이전부터 차원 높은 도덕성을 강조했다. 따지고 보면 2002년 대선에서 그가 당선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도 보수진영을 대표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아들 병역비리 의혹이었다. 대통령이 된 뒤인 2003년 10월 최도술 당시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SK그룹에서 11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을 때는 “내가 모른다고 할 수 없다”며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다. 2004년 대선자금 수사 때도 “불법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생전에 노 전 대통령이 도덕적 기준을 한껏 높여놨기 때문에 스스로 도덕주의의 덫에 걸린 측면이 있다”며 “재임 기간에도 정치개혁이나 깨끗한 정치를 강조했고, 이를 중요한 업적으로 내세웠던 터라 이번에 비리 의혹에 연루됐을 때 자신을 둘러싼 혐의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이 도덕성을 강조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를 보면, 깨끗한 정치에 대한 열망을 담은 도덕주의 가치와 담론은 196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이 처음 제시했다. 비록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한 구호에 불과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가 발전을 위해 부패한 기성 정치인, 정쟁을 일삼는 정치판을 청산하겠다는 그럴듯한 목표를 내세웠다. 1980년대 초 ‘사회악 일소’를 내세웠던 전두환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와 도덕은 서로 다른 영역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등 권위주의 체제는 정부와 정치 지도자가 부패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구조였지만, 정치인과 정치 관련 부패 사건이 언론에 등장하고 검찰에 기소되는 빈도는 오히려 김대중 정부 후기로 오며 증가했다. 최장집 교수는 “권위주의 정부에 비해 민주주의 정부에서 부패가 더 창궐했다고 보기 어렵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증거도 없다”며 “(이런 사건이) 많아진 것은 언론의 보도와 검찰 기소의 빈도이며 부패 문제를 이슈로 한 야당의 정부 비판과 공격의 빈도”라고 지적했다. 즉, 권위주의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감춰져있던 부패 문제가 더 쉽게 드러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대통령 주변의 부패 문제와 싸웠다. 조·중·동 등 수구언론과 한나라당은 특검제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를 괴롭혔다. 참여정부 초기 이들은 노 전 대통령의 도덕성과 관련해 썬앤문그룹 95억원 제공 의혹, 유전 개발 의혹, 행담도 개발 의혹, JU 로비 의혹, 바다이야기 연루 의혹 등 수많은 의혹을 제기했다. 의혹 대부분은 사안이 경미하거나 무혐의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법권력과 언론 영역 전반에 보수 헤게모니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던 노 전 대통령은 이런 공격을 가하는 보수 독점구조에 대항하기보다 역으로 도덕주의 담론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노 전 대통령의 비극은 이 지점에서 비롯됐다. 노 전 대통령 본인은 반부패와 깨끗한 정치 등의 모토를 높이 내걸고 정치개혁과 도덕주의적 이상을 동시에 달성하려 했지만, 정치개혁의 문제는 도덕주의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도덕주의적 관점으로 정치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태도에 문제를 지적했다. 쉽게 말해 정치와 도덕은 서로 다른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높은 도덕적 가치의 잣대로 정치를 이해하고 평가하려는 도덕주의 담론은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노 전 대통령도 부패 문제를 과거보다 더 (부패)했냐, 덜 (부패)했냐 하는 관점으로 접근하기보다, 책임정치와 참여의 확대 등을 통해 정치의 실질적 변화를 만들어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패 때문에 민주주의나 정치가 잘못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아직 부족해 부패가 유지되고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부패 담론의 ‘남발’은 자칫 정치 자체를 부패한 것으로, 정치인을 부패 집단으로 덧칠하는 효과가 있다. ‘정치는 썩은 것’이라는 덧칠은 당연히 정치에 대한 혐오와 냉소를 부채질한다. 역시 조·중·동이 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이는 결국 민주주의 발전에 부정적 영향를 낳을 수밖에 없다.
‘부패담론’이 반대파 절멸 수단으로정치에 도덕주의를 ‘과도하게’ 개입시키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또 있다. 국내외 역사를 보면 도덕성 관련 의혹은 권력을 가진 쪽이 상대 진영을 절멸시키거나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사례가 많았다. 미국에서도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민주당은 워터게이트나 이란 콘트라 사건 등을 통해 대통령을 공격했다. 공화당 역시 자신들이 의회를 장악했을 때 화이트워터, 르윈스키 사건으로 대통령을 몰아세웠다. ‘언론의 폭로-검찰 수사-정치적 상처’로 이어지는 과정은 한국의 ‘언론-검찰-정치권’ 관계와 다르지 않다.
최장집 교수는 에서 “정치와 관련된 부패 문제의 핵심은 국가와 사적 영역 사이의 ‘후원’과 ‘정치적 지지’가 교환되는 관계의 해소(즉 민주화)에 초점이 맞춰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권의 ‘부패담론’은 막강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보수 영역으로부터 ‘반대파 절멸’의 수단으로 악용돼 왔다”고 지적했다.
검찰에 세 차례 구속됐지만 세 번 모두 무죄를 받은 박주선 민주당 의원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의 공정성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박 의원은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정치인이 도덕성이란 문제에 대해 스스로 점검해보는 계기로 삼아야겠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검찰 수사가) 정치 보복적 차원에서 진행된다는 논란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승수 진보신당 의원도 “기본적으로 정치인은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받는 공인이기 때문에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수사과정을 보면 정권 차원의 보복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정상호 한양대 교수(제3섹터연구소)는 아예 정치적으로 독립된 수사기구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했던 것처럼 299명 국회의원을 각각 6개월씩 샅샅이 조사해보면 과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의문이다. 정치적 보복 수사나 검찰 수사의 편파성 시비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검찰에서 독립된 수사기구가 필요하다.”
도덕주의적 관점에서 시도했던 정치개혁의 결과도 설명돼야 할 부분이다. 특히 부패를 사전에 방지한다는 이유로 선거운동의 기간과 방법에서 대중과의 접촉면은 개혁을 할 때마다 계속 줄었다. 정치자금법은 최근 20여 년간 무려 여덟 차례 이상이나 개정했지만 선거 과정에서 부패 문제가 해소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번에 문제가 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사례에서 보듯, 한국 정치 현실에서 주요 대선후보나 당선자에게 기업이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것은 거의 일상화돼 있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예를 들어 2004년 개정된 정치관계법을 보면 후원회 운영과 후원금 모금은 물론 선거운동 방법까지 규제하고 있다”며 “문제가 있으니까 접촉 자체를 막아버리자는 것인데, 정치를 너무 이상적이고 규범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정치인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 역할은 팽창, 정당은 축소결과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국 사회가 정치권에 들이댄 도덕주의 프레임의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다. 최장집 교수는 “정치 경쟁이 더욱 원색적이고 저차원적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엄청나게 팽창하는 반면, 사회 저변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정당의 역할은 줄어드는 현상을 동반한다. 이 과정에서 투표자들에게 직접적인 ‘책임성’을 갖지 않는 기구들, 즉 검찰이나 사적 영역에서의 언론이 점차 정치의 중심 행위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이들은 “권력을 이용해 기업인들로부터 수천억원을 받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버젓이 살아있는데 이들보다 훨씬 도덕적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죽음에 이르렀다”고 안타까워했다. 봉하마을에 있는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은 5월23일 늦은 밤 과의 통화에서 “비도덕적 정치인에게는 도덕을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도덕의 잣대를 높여놓은 도덕적 인간에게는 끝없이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국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냐”며 울분을 참지 못했다. 도덕주의의 역설이다.
최성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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